[굿모닝 예향] 마을사람들의 미술둥지, 진도현대미술관
2025년 07월 16일(수) 12:05
지역민들을 위한 미술 둥지가 되고자 하는 진도현대미술관 전경. <최현배 기자>
진도읍 중심가에 자리한 진도현대미술관. 이름만 들으면 공립미술관처럼 느껴지지만, 알고 보면 진도의 다섯 사립미술관 중 하나다. 교직 생활을 하던 박주생 관장이 퇴직 전후로 직접 공간을 꾸리고,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 공동체로 작동한다.

“처음엔 놀이터처럼 시작했어요. 오후면 사람들이 차 마시러 들르고, 동네 사랑방처럼 쓰였죠.” 박 관장의 말처럼, 진도현대미술관은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자, 진도의 예술을 일상화하는 공간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전시와 교육, 지역문화 활동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마을 속 문화기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마을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한 초등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박주생 관장(왼쪽). <최현배 기자>
미술관에 도착한 평일 오전 시간, 1층 전시실 한쪽 테이블에서는 저학년으로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둘러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을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이었다. 진도교육청과 협력해 운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1년 동안 학교별 신청을 받아 이뤄진다. 지난 한 해에만 40여 개교 9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다녀갔다.

박 관장은 미술관이 단순히 그림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이 예술과 가까워지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진도의 전통 맥이 끊기고 있는 게 안타까웠다고 할까요. 미술관에서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통해 예술에 관심을 갖고, 나아가 한 명이라도 이 길로 나아간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학생들이 미술관에서 단순히 그림 체험만 하는 게 아니라 미술관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또 미술관에 갔을 때 예절이나 미술 감상법도 배워갈 수 있거든요.”

매주 수요일에는 지역민을 위한 성인 그림 수업도 진행된다. 귀농·귀촌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진도의 자연 풍광을 담은 한국화 위주로 구성된다. 참여자들은 단순한 수업을 넘어, 차를 함께 마시고 전시실을 둘러보며 문화를 나누기도 한다. 예술을 매개로 마을이 연결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진도는 국악의 고장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미술에서도 예향(藝鄕)의 결을 강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조선시대 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진도 출신이며,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전 허문, 동원 허은 등이 맥을 이어왔다. 박주생 관장이 운영하는 진도현대미술관은 이 예술의 흐름을 현재로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점이다.

진도에는 현재 현대미술관을 포함해 5곳의 사립미술관이 운영 중이다. 여귀산미술관(임회면), 솔마루미술관(군내면), 산꽃미술관(진도읍), 나절로미술관(임회면) 등이다. 현대미술관을 제외한 나머지 4곳은 모두 옛 폐교를 리모델링했다.

박 관장은 “전국적으로도 작은 지역에 이렇게 다양한 미술관이 있는 건 드문 일”이라며 “그만큼 예술의 토양이 깊은 곳”임을 강조했다.

진도현대미술관 1층에는 박주생 관장의 인물화가 상설 전시되고 있다. 그는 오랜 교직 생활 중에도 그림을 그렸고 퇴임 후에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초반에는 산수화를 주로 그리다가 지금은 인물화를 위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박주생 관장. 인물화를 위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최현배 기자>
작업실은 1층 별도의 공간에 따로 마련돼 있다. 화구와 캔버스, 물감, 그리다 만 듯한 스케치들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지만 그 안에서도 자연스러운 질서가 느껴진다.

박 관장의 그림에는 우리 이웃들의 온기가 묻어난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 빵 냄새 나는 이웃, 장터의 노인, 이른 새벽 인력시장을 찾은 아저씨 등 익숙한 얼굴들이다. 그는 인물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보다 삶의 궤적과 감정의 결에 더 집중한다. 옷차림이나 표정, 배경 하나에도 삶의 서사가 묻어나도록 구성한다.

“화려하거나 특별한 사람을 그리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낯익고 소박한 얼굴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오죠.” 작품 속 인물들은 뚜렷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대개는 무표정에 가깝다. 하지만 무표정 속에 담긴 눈빛이나 손의 위치, 입가의 주름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남다르다. 시골 삶의 단단함과 고단함, 그 속에서 잊혀가는 온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 관장의 그림에는 우리 이웃들의 온기가 묻어난다. <최현배 기자>
관장의 대표작 중 하나는 비 오는 날 인력시장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중년 남성을 그린 인물화다. “빗속에서도 서로 말을 아끼며 서 있는 모습에서 서로 눈치를 보며 긴장하고 있는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어요. 시대의 암울한 상황도 담아낼 수 있었고요”

또 다른 그림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 속 인간 군상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일정한 틀 안에 갇혀 있는 현대인의 풍경을 담아냈다.

박 관장은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기질 덕분에, 초등학생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부모님은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지만 끝내 미술교사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은 미술관 관장으로, 작가로, 때로는 교육가로 진도에서 여전히 그림 속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도현대미술관은 2000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한다. 과거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그림 작품과 가구, 골동품까지 40여 년간 박 관장이 수집해 온 작품들이 상당하다. 특히 진도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꾸준히 수집해 왔으며, 소치 허련의 아들 미산 허은의 인물화, 남농 허건의 ‘녹우도’가 포함돼 있다. 소장품 중 허련의 요절한 큰아들인 허은의 그림에 허련이 제문을 쓴 ‘능호거사진영’은 문화재급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외지로 흩어지기 전에 진도에 남겨두고 싶었어요. 미술관이란 공간이 있어야 이런 유산도 머물 수 있으니까요.”

진도현대미술관 2층 전시실. <최현배 기자>
진도현대미술관에서는 매년 쉼 없이 전시가 열리고 있다. 12월과 1~2월은 미술관 소장품 위주로, 3월부터는 초대전과 단체전이 이어진다. 모든 전시는 무료이며, 대관료도 없다. 박 관장이 직접 전국 작가들에게 연락하고, 작가들 간의 추천으로 전시가 이어지는 구조다.

2025년 여름에는 60여 명의 전국 중견 작가들을 초청해 대형 순회전을 기획했다. ‘미술관에서 길을 묻다’라는 이름으로, 진도 사립미술관을 중심으로 열리는 이 전시는 “시골에서 예술을 본다는 일상성”을 지향한다. “미술관은 벽을 쌓는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길을 묻듯이 그림을 보고, 감상하고, 쉬어가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전시는 진도현대미술관(6월 21~30일)을 시작으로 산꽃미술관(7월 2~11일), 여귀산미술관(7월 13~22일), 솔마루미술관(7월 24일~8월 2일) 으로 이어지고 있다.

진도현대미술관은 사립으로 운영되는 만큼, 경제적 여건은 넉넉지 않다. 관장은 사비를 털어 운영하며, 군에서 지원하는 일부 공공지원사업으로 프로그램을 이어간다. 초대 작가들에게 숙소나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대부분 자비로 감당한다. 그럼에도 박 관장은 미술관 같은 예술 공간이 지역민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림 한 점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미술관은 제 역할을 다한 게 아닐까요.”

/.이보람·이종수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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