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막는 시민들 보며 광주 5·18정신 떠올라”
광주명예시민 된 ‘푸른 눈의 시민군’ 데이비드 리 돌린저
윤상원 열사 통역·계엄군 무전 감청 등 ‘진실 알리기’ 앞장
유엔 인권침해 보고서 작성 등 5·18 이후에도 꾸준한 활동
윤상원 열사 통역·계엄군 무전 감청 등 ‘진실 알리기’ 앞장
유엔 인권침해 보고서 작성 등 5·18 이후에도 꾸준한 활동
![]() 데이비드 리 돌린저가 14일 전일빌딩245에서 1980년 5월 당시 자신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
“저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었어야 했습니다. 항쟁 마지막 날 전남도청 앞에 가서 앉아 있었더라면, 수많은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매일 후회합니다.”
14일 광주명예시민이 된 ‘푸른 눈의 시민군’ 데이비드 리 돌린저(69·미국)는 아직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서 투지와 ‘5·18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광주시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14일 돌린저에게 ‘광주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시민증 수여식에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1980년 5월을 떠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를 참지 못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직접 시민군으로 활동하며 해외에 광주의 진상을 알려 온 그였지만, 지금도 매일같이 광주를 떠올리며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았을까” 되묻게 된다고 한다. 당시 계엄군이 남긴 폭력적인 잔상을 떠올리며 계엄군 총부리 앞에서 목숨을 바치지 못해 후회가 남는다는 것이다.
돌린저는 5·18 당시 계엄군의 시민 진압을 목격한 뒤, 사상자를 파악하고 처참한 광주 현장을 촬영했으며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계엄군의 무전을 감청하며 시민군들과 함께 전남도청에서 하룻밤을 지새기도 하고,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외신 기자회견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돌린저가 광주에 오게 된 건 1978년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 영암보건소에 파견되면서다. 그는 광주와 외부의 교류가 끊겼던 당시 옛 전남도청 안팎에서 외신 기자들을 만나며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도맡았다.
계엄군의 진압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돌린저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계엄군의 시민 진압 장면을 목격했으며, 5월 21일에는 옛 전남도청 앞에서 무장 헬기가 출격한 장면을 봤다. 전남도청 상공에서 군복을 입은 사람이 총과 함께 헬기 밖으로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광주기독병원을 들렀을 때, 한 의사가 왼쪽 어깨에서 시작해 허리 아래로 통과하는 총상 환자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줬다. 돌린저는 “당시 광주 내 건물들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처럼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총상을 입으려면 헬기 사격을 당한 경우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돌린저는 5월 24일 군 무전을 감청하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은퇴 군인 1명, 대학생 1명과 함께였는데 같이 밤을 새면서 광주시민들의 힘을 느꼈습니다. 은퇴 군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딸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고 싶었다며 다음 세대를 위해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본인들 삶을 기꺼이 포기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한다는 이야기에 저 또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5·18 이후로도 돌린저는 광주를 알리기 위해 애썼다. 1980년에는 미군기지 영어강사로 근무하며 군사우편을 통해 광주와 한국 민주화운동 상황을 미국에 알렸다. 1981년 6월 유엔인권위원회 제출 한국 인권침해 보고서 중 광주 목격담을 작성했으며 2022년에는 ‘나의 이름은 임대운(돌린저의 한국명)’ 책을 출간하는 등 미래 세대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돌린저는 ‘12·3 비상계엄 사태’를 뉴스 속보로 접하고, 다시 한번 광주를 떠올렸다. 1980년 5월을 겪었던 한국에서 다시 한번 계엄을 선포했다는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도 잠시, 시민들이 계엄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돌린저는 “기습적인 계엄 선포 이후, 시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국회로 달려가는 모습을 속보로 지켜보고 있었다”며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이것이 바로 ‘광주 5·18 정신’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웃었다.
/글·사진=유연재 기자 yjyou@
14일 광주명예시민이 된 ‘푸른 눈의 시민군’ 데이비드 리 돌린저(69·미국)는 아직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서 투지와 ‘5·18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광주시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14일 돌린저에게 ‘광주시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돌린저는 5·18 당시 계엄군의 시민 진압을 목격한 뒤, 사상자를 파악하고 처참한 광주 현장을 촬영했으며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계엄군의 무전을 감청하며 시민군들과 함께 전남도청에서 하룻밤을 지새기도 하고,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외신 기자회견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계엄군의 진압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돌린저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계엄군의 시민 진압 장면을 목격했으며, 5월 21일에는 옛 전남도청 앞에서 무장 헬기가 출격한 장면을 봤다. 전남도청 상공에서 군복을 입은 사람이 총과 함께 헬기 밖으로 나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광주기독병원을 들렀을 때, 한 의사가 왼쪽 어깨에서 시작해 허리 아래로 통과하는 총상 환자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줬다. 돌린저는 “당시 광주 내 건물들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처럼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총상을 입으려면 헬기 사격을 당한 경우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돌린저는 5월 24일 군 무전을 감청하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은퇴 군인 1명, 대학생 1명과 함께였는데 같이 밤을 새면서 광주시민들의 힘을 느꼈습니다. 은퇴 군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딸에게 더 나은 미래를 주고 싶었다며 다음 세대를 위해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본인들 삶을 기꺼이 포기하며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한다는 이야기에 저 또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5·18 이후로도 돌린저는 광주를 알리기 위해 애썼다. 1980년에는 미군기지 영어강사로 근무하며 군사우편을 통해 광주와 한국 민주화운동 상황을 미국에 알렸다. 1981년 6월 유엔인권위원회 제출 한국 인권침해 보고서 중 광주 목격담을 작성했으며 2022년에는 ‘나의 이름은 임대운(돌린저의 한국명)’ 책을 출간하는 등 미래 세대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돌린저는 ‘12·3 비상계엄 사태’를 뉴스 속보로 접하고, 다시 한번 광주를 떠올렸다. 1980년 5월을 겪었던 한국에서 다시 한번 계엄을 선포했다는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도 잠시, 시민들이 계엄을 저지하기 위해 국회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돌린저는 “기습적인 계엄 선포 이후, 시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국회로 달려가는 모습을 속보로 지켜보고 있었다”며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이것이 바로 ‘광주 5·18 정신’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웃었다.
/글·사진=유연재 기자 yj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