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동화와 미망의 겨울잠에서 깨어나- 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2023년 12월 04일(월) 00:00
어느새 올 한해가 끝자락이다. 해가 바뀌기는 하지만 시간 단위는 사실 편의상 나눈 것일 뿐, 시간은 연속되는 흐름이다. 그래서 어디서 왔는가 보다는 어디로 가는가가 더 중하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시간을 뒤로 되돌리려 한다. 앞으로 나가는 시간 대신에 지난 시간의 형식과 내용으로 현재를 결정한다. 그런데 ‘지금’이 텅 빌 때, 할 수 있는 일은 갈피를 잃어버리고 미망에 빠지는 것뿐이다. 미망은 한번 빠져들면 쉽게 깨어나기는 어렵지만 증폭되기는 쉽다. 미망은 흔히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 ‘다 똑같다’라는 생각이 만들어 내는 방향과 판단을 잃은 혼란이다. 이 미망의 겨울잠에서 깨어날 열정도 의지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곧 겨울 동화 속 삶이다.

‘어느 겨울 동화’는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가 쓴 시집이다. 제목이 한겨울에 온통 순백으로 덮인 동화의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하이네가 쓴 이 겨울 동화는 낭만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 시의 시대적 배경은 1843년 겨울로, 당시 파리로 망명해서 살던 하이네는 13년 만에 독일을 여행한다. 마침내 하이네는 국경에 도착하지만, 눈앞의 독일 모습에 크게 실망한다. 시민의 권리와 자유가 실현된 프랑스와 달리 독일은 여전히 과거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세관원은 불온서적을 찾기 위해서 하이네의 짐을 검색하고, 어디선가 들리는 노래는 열정도 기쁨도 없는 ‘체념의 노래’ 뿐이다. 새로운 희망의 노래를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여전히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고, 이미 끝난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는 독일을 하이네는 깊은 겨울잠에 빠진 상태로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하이네의 겨울 동화는 잠을 재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너무 깊은 잠을 깨우기 위한 날카롭고 냉정한 동화다.

겨울은 ‘깊은 잠’, 또는 ‘얼어붙은 상태’ 즉 미망의 상태를 뜻한다. 겨울은 시대적 발전을 거부하고 죽음 같은 침묵 상태에 빠져있는 당시 독일의 이미지이다.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이 시대 착오와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 있으며, 자기도취적 환상에 취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세상과는 동떨어진 겨울 동화의 나라이며,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잠을 자고 있으며, 아는 노래는 체념의 노래를 부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특히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이념이 독일을 깊은 겨울잠에 빠지게 한다고 말한다. 반시대적인 겨울잠과 현실을 왜곡하는 겨울 동화의 나라에서는 시민이 깨어나기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동화 나라에는 시민이 없다. 늘 선하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지배자가 자비로운 마음으로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들을 보살펴주지 않는가! 이를 두고 하이네는 겨울 동화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이네는 자신이 세상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때는 아주 위험한 시기였고, 그래서 침묵은 절반의 배신이었습니다.”

몇 가지를 빼면 겨울 동화 이야기는 오늘날 이야기인가 싶게 낯익다. 지금도 부당한 권위주의, 낡은 억압 방식과 시대착오적인 도덕과 인습의 문제는 여전하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삶을 가로막는 우리의 미망에서 하이네의 겨울 동화를 경험한다. 하이네는 대체로 서정시인으로 평가되지만, 그렇지 않다. ‘독일, 어느 겨울 동화’에서 그는 현실을 직시한 시인임을 보여준다. 시인은 과거로 회귀하며 삶을 체념하는 대신에, 현재와 미래를 사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서로 ‘빵’을 나누고, 삶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공유할 때 ‘부지런한 손’이 고통을 겪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당시에는 매우 위험했다. 1835년에 독일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그의 저술이 금서 조치를 당한 이유다. 하지만 독일의 대문호 토마스 만은 하이네를 “독일이 배출한 가장 우아하고 자유로우며 대담한 예술 정신”이라고 극찬했다.

이제 누구든, 개인과 사회적 공간에서도 미망의 겨울잠을 깨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때다. 귀에 익은 체념과 탄식의 노래 대신, ‘새로운 노래, 좀 더 나은 노래’를 준비할 시간이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행복하고자 함으로써 더 이상 궁핍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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