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기개 솔숲에 오롯이…변함없는 운치에 ‘만취’
[광주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호남 누정-광주 <11> 만취정]
구한말 대학자 만취(晩翠) 심원표가 건립
일제 침략에 김준·심수택 등과 항쟁 도모
의병 돕다 헌병대 끌려가 고초 겪기도
내부에 당대 문사·학자들의 문장 걸려
정내엔 수십종의 나무·화초 우거져 울창
인생 만년에 이르러도 변치않은 충절 환기
2023년 09월 03일(일) 21:35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남동 마을에 있는 만취정은 구한말 대학자 만취(晩翠) 심원표가 지은 정자다.
언어는 존재를 규정한다. 이름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명칭이 사물의 본질을 지지하는 것과 다름없는 이치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문학적 비유를 넘는 다분히 철학적인 명제다.

무릇 모든 존재는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하늘’과 ‘바다’로 불릴 때 비로소 의미가 획득된다. 이름이 없거나, 있다 해도 호명되지 않으면 그 존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존재성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원표 선생의 아들과 손자의 영정이 봉안된 남동사.
학창시절 배웠던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는 명 구절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은 언어와 존재의 관계를 명징하게 보여준 표현이다.

화자의 고백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 존재가 아닌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만취정 가는 길, 그렇게 언어와 존재를 생각했다. 처음엔 호기로운 생각마저 들었다. 언어가 존재를 규정한다고 하지 않던가. 산야 누정에서 음풍농월을 읊는 조선의 선비들이 그려졌었다. 권커니 잣거니 술잔을 기울며 시의 운율을 띄웠을 선비들을 떠올렸다. ‘만취’에서 ‘대취’(大醉)를 떠올렸음이다. 그러나 언어의 다의성, 동음이의어와 같은 언어의 일반적인 특징을 간과한 필자의 무식에서 비롯된 오독(誤讀)이었다.

만취정의 ‘만취’(漫醉)는 술에 잔뜩 취한 것을 이르는 말이 아니었다. ‘만취’(晩翠)는 늦은 겨울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소나무나 대나무의 푸르름을 뜻했다. 물론 자연적인 비유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인생 만년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는 지조를 말하는 것이었다.

만취정은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남동이라는 마을에 있는 정자다. 이 마을 출신 구한말 대학자 심원표(1853~1939)가 지은 정자다. ‘만취’(晩翠)는 그의 호다. 심원표가 삶에 있어 지조와 절개를 얼마나 소중한 가치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구한말 의병을 돕다 일제의 미움을 받아 헌병대에 끌려가 적잖은 고초를 당했다. 대가 약한 사람이었다면 쉽사리 일경에 밀고를 하거나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대나무 같은 의인이었다. 그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 가운데 한명인 묵헌(默軒) 심풍의 13세 손이었다.

정내에는 만취(漫醉)라는 명칭의 유래를 담은 ‘만취정소서’(晩翠亭小序)가 걸려 있다. “나의 씨족인 심씨의 본관이 청송으로 되어있고 또 송이라는 나무가 언제나 울창하여 겨울 추위에도 그의 푸르름을 잃지 않는 높은 절개를 갖고 있다. 이 정자를 남쪽에 지어 만취라고 한 것은 소나무의 이러한 절개를 본받아 나의 만년을 보내는 장소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만취 선생은 십 대에 노사 기정진(1798~1879)과 연재 송병선(1836~1905)에게 학문을 배웠다. 위인의 도와 의리 등을 내면화했다. 자연과 벗하며 고결한 삶을 살고 싶었다. 특히 한일합방 이후에는 어떠한 사사금(思賜金)도 거절한 채 초야에 묻혀 강학을 하고 시를 지었다.

그의 지조는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지자 빛을 발했다.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고 식자들이 침묵을 지킬 때 그는 의연하게 일어섰다. 김준, 심수택 등을 도와 백척간두에 선 민족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선생에게 돌아온 것은 당연히 고난과 고초였다. 그러나 그는 의를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조선의 선비로서의 자존을 지켰다. 만취(晩翠)라는 호에 조금의 수치도 깃들게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에서 조선 선비의 길을 조금이나 읽어낼 수 있다. 심원표가 지향했던 ‘푸르름’이 느껍게 다가온다.

만취정에서 바라본 풍경.
금성산 북쪽에 숨어 살면서 정자를 하나 짓고

푸른 솔의 높은 전개가 그곳에 남아 있구나

구름 덮인 숲에 기거하며 나의 뜻 이루었으니

산 집에서 빚은 술로 손님의 술상을 차렸네.

땅을 덮은 서늘한 그늘이 선비집 마당에 들어앉고

하늘 높이 솟은 기상은 사시장철 푸르기만 하네

만취라는 두 글자로 이 정자를 이름하니

무어에 맑은 꽃들과 이른 봄볕을 즐길 것인가.

(만취 심원표 시)

정내는 오래된 수목이 우거져 울창했다. 수십 종의 나무와 화초들이 버성기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빽빽이 들어찬 정원에서 유서 깊은 역사의 갈피가 읽혀진다. 본 바탕은 잘 가꿔진 정원이었을 듯싶다. 그러나 지난여름 장마철과 폭우가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웃자란 풀과 부러진 가지가 쓸쓸함을 더해준다.

정자에는 만취정(晩翠亭) 편액이 두 개가 걸려 있다. 하나는 해강 김규진이, 또 하나는 석촌 윤용구가 썼다고 전해온다. 특히 근대 서화가인 김규진은 산수화와 화조화를 잘 그렸다. 예서, 해서, 행서, 초서에 묘경(妙境)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가 있다.

청송심씨 인물인 심선, 심풍 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동호사.
내부에는 당대 문사와 학자들의 문장이 걸려 있다. 송사 기우만을 비롯해 후석 오준선, 석음 박노술 등의 글은 만취 선생의 성품과 문장을 상찬한 시문들이다.

만취정 바로 옆으로는 의미있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심원표 선생의 아들 심종대, 손자 심한구의 영정이 봉안된 남동사가 있다. 바로 이웃한 또 하나의 건물은 청송심씨 인수부윤공파 인물인 심선, 심풍, 심광헌 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동호사다.

지조와 절개가 헌신짝보다 못한 세상이다. 여반장 하듯 뒤집는 세태에서 만취 선생의 의로움은 빛이 난다. 항일을 언행일치로 보여주었던 그는 시대를 초월해 오늘의 사표로 손색이 없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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