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단골 가게들 -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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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북 토크 행사를 했던 어느 날이었다. 행사를 온라인 라이브 송출한다는 것까지도 괜찮았는데, 내가 실시간으로 방송을 확인할 수 있도록 내 앞에 태블릿 하나를 놓아준 것이었다. 태블릿을 치워 달라고 말할 찬스를 놓친 채 얼떨결에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스트레스를 받을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북 토크를 하는 것과, 내가 북 토크 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는 내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니터의 화면을 보면서 내내 생각하게 된다. 말할 때 왜 입이 비뚤어지지? 머리는 왜 저렇지? 멍청하게 웃는 저 촌스러운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다행히 그날 나는 그런 괴로운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았다. 모니터를 보면서 몇 번 구부러진 허리를 바르게 펴기는 했지만 그건 주최 측이 내 앞에 태블릿을 놓아준 의도와 아주 부합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모니터 속의 내 모습을 헐뜯고 경멸하지 않으며 오로지 대화에 집중했다. 나는 평화롭게 행사를 마쳤다.
이 일은 나에게 뜻하지 않은 큰 기쁨을 주어,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일을 흐뭇하게 되새겼다. 작가 경력 20년만에 드디어 나에게도 경륜이나 자신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이제 모니터 속의 내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베테랑이 되었다. 어쩌면 흔히 ‘나 자신과의 화해’라고 말하는 일을 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고 담담하고 편안한 눈으로 나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단골 옷가게에서 봄 세일을 한다는 안내 문자가 왔을 때 나는 갑자기 이날의 북 토크를 번개같이 다시 떠올렸다. 그날의 일들이 빠른 속도로 머리 속에서 재생되면서, 이날 모니터 속의 내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했던 생각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때 나는 북 토크를 하는 중간중간 이런 생각들을 했다. 린넨 재킷을 사길 잘했어. 역시 독자들을 만날 때는 재킷이 좋아. 예의를 차린 듯하면서도 린넨 소재가 주는 어떤 자유로움이 있거든. 한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잘 입을 수 있겠다. 앞머리가 많이 길었네. 펌 한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음 주 쯤에는 미용실에 가야지….
이리하여 나는 지난 10년간 나에게 일어난 숨은 변화와 그 결과를 갑자기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인터뷰에서라도 나에게 지난 10년간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꼽아 보라고 물었을 때 내가 미용실이나 옷가게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내가 겪었던 가족 간의 일들, 작가로서의 이력, 읽었던 책들이나 사회적인 현상들과 관련된 대답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 인생에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변화를 이룬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내 단골 미용실 원장님이나 옷가게 사장님 같은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찾아 내 옷장의 거의 90% 이상을 채웠다. 처음에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입했지만 이제는 온라인으로 사도 이 브랜드 옷들의 분위기와 재질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브랜드 제품들을 고루 사 보면서 어떤 디자인과 분위기가 나와 잘 어울리는지 상당한 데이터가 축적되었으므로 어떤 옷을 사든지 만족도가 높고 오래 입는 편이다.
그리고 감사한 미용사 님. 이분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미용실에 가는 일을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 의견 따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분께 머리를 맡기고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알아서 필요한 일들을 쓱쓱 다해 주신다.
오랫동안 나에게 미용실과 백화점은 치과만큼이나 가기 싫은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고, 상당한 돈을 쓰고도 그 결과는 항상 미심쩍었다. 쇼핑과 스타일링에 대한 자괴감은 자존감마저 깎아 먹어 공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에 불필요한 위축감이 들게 했다. 하지만 나의 이 아름다운 단골 가게들은 내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구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바꾸어 생각하면 일상 속에서 대단치 않은 일들로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 스트레스를 받을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북 토크를 하는 것과, 내가 북 토크 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지켜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는 내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니터의 화면을 보면서 내내 생각하게 된다. 말할 때 왜 입이 비뚤어지지? 머리는 왜 저렇지? 멍청하게 웃는 저 촌스러운 여자는 도대체 누구지?
좋아하는 단골 옷가게에서 봄 세일을 한다는 안내 문자가 왔을 때 나는 갑자기 이날의 북 토크를 번개같이 다시 떠올렸다. 그날의 일들이 빠른 속도로 머리 속에서 재생되면서, 이날 모니터 속의 내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했던 생각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때 나는 북 토크를 하는 중간중간 이런 생각들을 했다. 린넨 재킷을 사길 잘했어. 역시 독자들을 만날 때는 재킷이 좋아. 예의를 차린 듯하면서도 린넨 소재가 주는 어떤 자유로움이 있거든. 한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잘 입을 수 있겠다. 앞머리가 많이 길었네. 펌 한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음 주 쯤에는 미용실에 가야지….
이리하여 나는 지난 10년간 나에게 일어난 숨은 변화와 그 결과를 갑자기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인터뷰에서라도 나에게 지난 10년간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꼽아 보라고 물었을 때 내가 미용실이나 옷가게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내가 겪었던 가족 간의 일들, 작가로서의 이력, 읽었던 책들이나 사회적인 현상들과 관련된 대답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 인생에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변화를 이룬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내 단골 미용실 원장님이나 옷가게 사장님 같은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찾아 내 옷장의 거의 90% 이상을 채웠다. 처음에는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입했지만 이제는 온라인으로 사도 이 브랜드 옷들의 분위기와 재질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 브랜드 제품들을 고루 사 보면서 어떤 디자인과 분위기가 나와 잘 어울리는지 상당한 데이터가 축적되었으므로 어떤 옷을 사든지 만족도가 높고 오래 입는 편이다.
그리고 감사한 미용사 님. 이분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미용실에 가는 일을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서 내 의견 따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그분께 머리를 맡기고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알아서 필요한 일들을 쓱쓱 다해 주신다.
오랫동안 나에게 미용실과 백화점은 치과만큼이나 가기 싫은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고, 상당한 돈을 쓰고도 그 결과는 항상 미심쩍었다. 쇼핑과 스타일링에 대한 자괴감은 자존감마저 깎아 먹어 공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에 불필요한 위축감이 들게 했다. 하지만 나의 이 아름다운 단골 가게들은 내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구매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
바꾸어 생각하면 일상 속에서 대단치 않은 일들로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보이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 감사하고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