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대들에 삼의사(三義士) 비를 세운 까닭은- 송기동 예향부장·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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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의사(三義士)의 죽음은 봉건제도 개혁과 나라를 위한 값진 희생이었다. 그러고도 패가망신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나 해주 최 씨 후손들은 조상들의 애국정신을 열심히 교육하였고 생활이 어려웠을 때도 일본인에게는 전답을 팔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마을에서 농악 놀이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지난달 29일 무안군 해제면 석용리 석산마을 입구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해주 최씨 삼의사 실적비’ 비문 일부다. 앞서 1973년에 후손과 마을 주민들은 같은 자리에 직접 ‘삼의사 실적비’를 건립했고, 이번에 새로운 중창비와 숭모단(崇慕壇)을 세웠다.
# “봉건 세력과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열강들의 침략 야욕에/ 분연히 맞서 싸운/ 당신들의 고귀한 뜻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당신들이 꿈꿔 온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우리가 꼭 이루겠습니다.”
무안군 ‘밀리터리 테마파크’에서 멀지 않은 몽탄면 다산리 차뫼마을 앞 도로변에 ‘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응문·김효문·김자문·김여정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그 왼편에는 현창비 건립 추진위원회 명의의 ‘조그마한 독 하나를 세우며’라는 제목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치열했던 1894년 11월 ‘고막포 전투’
삼의사는 석산마을 출신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인 민제(敏霽) 최장현(문빈)과 청파(淸波) 최선현(이현) 형제 그리고 사촌인 춘암(春菴) 최기현 등 세 분을 일컫는다. 둑을 막아 형성된 ‘민대들’로 불리는 석대마을 앞 들녘은 129년 전 무안 동학농민군의 훈련장이었다. 마을에는 동학군이 목을 축였던 ‘방정’(芳井) 샘도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 입구 이정표에 ‘동학의 땅’이라 돼 있고, 도로명 주소 또한 ‘동학길’이다. 김응문 일가(김응문·효문·자문 형제와 아들 여정) 또한 무안의 대표적인 동학농민군 지도자였다. 형제와 부자가 함께 참여한 무안 출신 동학 지도자들의 의로운 삶을 새긴 비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129년 전 나주와 무안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함께 일본군의 만행을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무안은 전라 서남부 지역 동학의 주요 거점이었다. ‘전봉준을 능가하는 거괴(巨魁)’로 불린 배상옥 장군이 이끄는 무안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17~24일(음력) 나주 읍성에서 직선거리로 10여㎞ 떨어진 고막포 일대에서 나주 수성군과 혈전을 벌인다. 삼의사도 석산마을 ‘민대들’에서 훈련했던 농민군을 이끌고 현경과 무안읍을 거쳐 나주로 향했다. 김응문 장군 일가도 고막포 전투에 참여했다. 동학군 수는 5만~6만 명, 수성군은 3000여 명 규모였다. 동학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대포와 소총 등 현대식 무기를 갖춘 수성군의 화력을 화승총과 시석(矢石), 죽창만으로 이길 수 없었다.
고막포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민보군에 쫓겼다. 관군은 무안읍 ‘붉은 고개’(붉은 잔등), 청계면 창포 ‘바우백이’, 삼향면 ‘마갈잔등’ 등지에서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붙잡은 동학군들을 무안읍 ‘불무다리’에서 처형하고 인근 ‘차밭머리’에서 시신을 겹겹이 포개어 불태웠다. 또한 삼의사를 비롯해 13살 ‘소년 장수’ 최동린 등 783명 이상의 동학 지도자급들이 일본 정토군(동학 토벌대) 본부인 나주 순사청으로 압송돼 처형됐다.
무안 동학 역사 기억하고 계승해야
김희태 전(前)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의 연구 논문 ‘동학농민혁명군의 나주로의 압송과 처형’에 따르면 일본 동학토벌대는 동학 지도자급을 나주 순사청으로 압송하도록 지시한 후 총살, 돌살(突殺·착검하고 찔러죽이는 것), 타살(打殺), 소살(燒殺) 등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죽였다.
후손들이 비를 세운 까닭은 129년 전 조상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함이다. 실적비와 현창비에서 후손들의 자긍심이 느껴진다. 오는 10월에는 나주시에 동학 관련 새로운 비가 세워질 예정이다. 한국과 일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해 세우는 ‘나주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비’다. 이러한 움직임은 윤석열 대통령이 외신 인터뷰에서 밝힌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는 역사 인식과 대조를 이룬다. 지난 2017년 12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 옛 표본 창고에서 방치된 채 100년만에 발견돼 반환된 진도 출신 동학 지도자의 두개골 사례처럼 직계 후손 찾기는 요원하기만 하다.
최근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등 동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40년간 동학을 연구해온 박맹수 전 원광대 총장은 ‘왜 지금 다시 동학인가?’라는 물음에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의 대전환을 이뤄갈 지혜가 동학에 있다”고 밝힌다. 129년 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산야에서 스러져 버린 수십만 명의 무명(無名) 동학농민군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되살려 내야 할 것이다.
/ song@kwangju.co.kr
# “봉건 세력과 탐관오리들의 횡포와 열강들의 침략 야욕에/ 분연히 맞서 싸운/ 당신들의 고귀한 뜻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당신들이 꿈꿔 온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우리가 꼭 이루겠습니다.”
무안군 ‘밀리터리 테마파크’에서 멀지 않은 몽탄면 다산리 차뫼마을 앞 도로변에 ‘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응문·김효문·김자문·김여정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그 왼편에는 현창비 건립 추진위원회 명의의 ‘조그마한 독 하나를 세우며’라는 제목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삼의사는 석산마을 출신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인 민제(敏霽) 최장현(문빈)과 청파(淸波) 최선현(이현) 형제 그리고 사촌인 춘암(春菴) 최기현 등 세 분을 일컫는다. 둑을 막아 형성된 ‘민대들’로 불리는 석대마을 앞 들녘은 129년 전 무안 동학농민군의 훈련장이었다. 마을에는 동학군이 목을 축였던 ‘방정’(芳井) 샘도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 입구 이정표에 ‘동학의 땅’이라 돼 있고, 도로명 주소 또한 ‘동학길’이다. 김응문 일가(김응문·효문·자문 형제와 아들 여정) 또한 무안의 대표적인 동학농민군 지도자였다. 형제와 부자가 함께 참여한 무안 출신 동학 지도자들의 의로운 삶을 새긴 비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129년 전 나주와 무안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함께 일본군의 만행을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무안은 전라 서남부 지역 동학의 주요 거점이었다. ‘전봉준을 능가하는 거괴(巨魁)’로 불린 배상옥 장군이 이끄는 무안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17~24일(음력) 나주 읍성에서 직선거리로 10여㎞ 떨어진 고막포 일대에서 나주 수성군과 혈전을 벌인다. 삼의사도 석산마을 ‘민대들’에서 훈련했던 농민군을 이끌고 현경과 무안읍을 거쳐 나주로 향했다. 김응문 장군 일가도 고막포 전투에 참여했다. 동학군 수는 5만~6만 명, 수성군은 3000여 명 규모였다. 동학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대포와 소총 등 현대식 무기를 갖춘 수성군의 화력을 화승총과 시석(矢石), 죽창만으로 이길 수 없었다.
고막포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민보군에 쫓겼다. 관군은 무안읍 ‘붉은 고개’(붉은 잔등), 청계면 창포 ‘바우백이’, 삼향면 ‘마갈잔등’ 등지에서 동학군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붙잡은 동학군들을 무안읍 ‘불무다리’에서 처형하고 인근 ‘차밭머리’에서 시신을 겹겹이 포개어 불태웠다. 또한 삼의사를 비롯해 13살 ‘소년 장수’ 최동린 등 783명 이상의 동학 지도자급들이 일본 정토군(동학 토벌대) 본부인 나주 순사청으로 압송돼 처형됐다.
무안 동학 역사 기억하고 계승해야
김희태 전(前)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의 연구 논문 ‘동학농민혁명군의 나주로의 압송과 처형’에 따르면 일본 동학토벌대는 동학 지도자급을 나주 순사청으로 압송하도록 지시한 후 총살, 돌살(突殺·착검하고 찔러죽이는 것), 타살(打殺), 소살(燒殺) 등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죽였다.
후손들이 비를 세운 까닭은 129년 전 조상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함이다. 실적비와 현창비에서 후손들의 자긍심이 느껴진다. 오는 10월에는 나주시에 동학 관련 새로운 비가 세워질 예정이다. 한국과 일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해 세우는 ‘나주 동학농민군 희생자를 기리는 비’다. 이러한 움직임은 윤석열 대통령이 외신 인터뷰에서 밝힌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는 역사 인식과 대조를 이룬다. 지난 2017년 12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 홋카이도 대학 옛 표본 창고에서 방치된 채 100년만에 발견돼 반환된 진도 출신 동학 지도자의 두개골 사례처럼 직계 후손 찾기는 요원하기만 하다.
최근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등 동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40년간 동학을 연구해온 박맹수 전 원광대 총장은 ‘왜 지금 다시 동학인가?’라는 물음에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의 대전환을 이뤄갈 지혜가 동학에 있다”고 밝힌다. 129년 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산야에서 스러져 버린 수십만 명의 무명(無名) 동학농민군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되살려 내야 할 것이다.
/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