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석(可石) 김도숙-송기동 예향부장
2022년 11월 15일(화) 00:45
“강물의 외침을 듣고 갑옷을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했고/ 산하를 보고 의병을 만들 것을 원했노라.”

1907년 대한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일제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고종을 7월에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 체결을 강요했으며, 8월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에 같은 해 11월 나주 한 선비가 각 지역 유림들에게 의병 일으키기를 촉구하는 격문(檄文)을 띄운다.

격문을 쓴 가석(可石) 김도숙(1872~1943)은 함평 출신 남일(南一) 심수택과 힘을 합쳐 거의(擧義)한 후 의병진 도통장(都統將)을 맡았다. 600여 명으로 구성된 심남일 의병부대는 나주와 남평·능주·장흥·강진·해남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하지만 1909년 9~10월 진행된 일본의 대규모 ‘남한 대토벌작전’에 의해 가석은 나주 남평에서 사로잡혀 7년동안 광주 감옥에 갇혔다.

그동안 가석의 후반 생애는 역사의 뒤안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호남 회화사에서 소외된 서화가를 발굴하고 조명하는 작업’에 온 힘을 쏟고 있는 한 한국화 화가에 의해 가석의 행적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다행스럽게 열 폭 ‘노송도’와 ‘노안도’(蘆雁圖) 등 소수의 작품이 남아있어 그가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 호남의 유일한 의병지사 화가’였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석주 박종석 화백은 최근 펴낸 ‘사생취의(捨生取義)-의병지사 김도숙의 삶과 예술’에서 가석에 대해 ‘나주와 영산강이 낳은 은일지사(隱逸志士)이자 품격을 갖춘 사생취의의 서화가’라고 평한다. 박 화백은 ‘사생취의’전을 무등현대미술관(~12월 10일)에서 열고 있다. 가석 김도숙을 비롯해 죽봉 김태원·심남일·전해산·박사화·나성화 등 여러 의병장을 ‘이름 없는 별들을 위하여’ 등 대형 작품 속에 되살려 냈다.

구름 속에 가려진 샛별이 드러나듯 그동안 잊혀졌던 호남의 유일한 ‘의병지사 화가’의 숭고한 삶과 예술 세계가 비로소 빛을 발하고 있다. 앞으로 ‘근현대 한국회화사에서 한 번도 조명되지 않은 항일지사이자 문인화가’를 회화사에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송기동 예향부장 song@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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