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물납제’ 당신의 생각은?
2021년 03월 09일(화) 22:30
박진현 제작국장·문화선임기자
요즘 지역 미술계의 화제는 오는 23일 광양시 옛 광양역사 부지에 문을 여는 전남도립미술관이다.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예향이라지만 지금까지 전남도를 상징하는 대표 미술관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지역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은 화려한 컬렉션이다. 소치 허련의 ‘대나무 8폭’, 오지호의 ‘항구’, 김환기의 ‘1-1964’ 등 139점의 소장 작품이 그것이다. 이는 신생 미술관의 텅 빈 수장고를 채우기 위해 전남도가 ‘한시적으로’ 지원한 예산 59억 원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외국의 유명 미술관들은 우리에겐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 교과서에나 봤던 세기의 명작들을 보유하고 있는 컬렉션의 상당수가 기업인이나 개인 컬렉터들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뉴욕현대미술관은 미국의 석유 재벌 록펠러 가문의 메세나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마티스의 ‘춤’ 등을 품에 안았다. 밀레,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등 19∼20세기 프랑스 미술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일본 국립서양미술관도 가와사키 조선소 회장 마스가타 고지로의 컬렉션 370점이 모태가 됐다.

최근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과 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회장의 컬렉션(이건희 컬렉션)이 국내 문화계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평생 미술품을 수집해 온 컬렉터라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결은 조금 다르다. 간송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유출될 뻔한 국보급 문화재 5000여 점을 수집한 ‘문화재 지킴이’이고, 지난해 10월 별세한 이 전 회장은 40년간 국내외 미술품을 수집한 ‘큰손’이었다.

이들의 컬렉션이 새삼 ‘뉴스메이커’가 된 건 다름 아닌 막대한 상속세 때문이다. ‘한국의 미’를 지켜 달라는 간송의 뜻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간송 컬렉션’ 창고지기로 살아 왔다. 하지만 2년 전, 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타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간송의 국보급 문화재들을 물려받은 후손들에게 막대한 상속세가 부과되자 지난해 5월 보물 2점이 경매시장에 나온 것. 다행히 한 번의 유찰 끝에 이들 보물이 국립중앙박물관의 품에 안기면서 ‘문화재 해외 유출’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면했다.



간송 전형필과 이건희의 컬렉션



이건희 컬렉션 역시 ‘문화재 해외 유출’이 우려된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 국보급 문화재 160여 점을 비롯해 모네의 ‘수련’, 파카소의 ‘도라 마르의 초상’,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Ⅲ’등 주요 작품 값만 합쳐도 2~3조 원에 달하는 ‘월드 클래스’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유족이 상속세 11조 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를 경매시장에 내놓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실제로 해외미술계에선 깐깐한 검증을 거쳐 구입한 이건희 컬렉션에 벌써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글로벌 미술 사이트 ‘아트넷’(ArtNet)은 지난 5일 ‘과연 삼성가는 아트딜러로부터 컬렉션을 지켜낼 수 있을까’라는 기획 기사를 내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근래 문화계를 중심으로 미술품에 대한 ‘상속세 물납제’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미술협회 등 문화계 단체들은 최근 “문화재와 미술품은 한 국가의 과거를 조명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자 현재의 시대상을 함축하는 만큼 ‘문화재·미술품 물납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문화체육관광부도 작년 11월 미술평론가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씨 등 전문가들을 초청, 상속세를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내는 물납제 도입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광재 더불어 민주당 의원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포함한 문화예술·미술시장 활성화 4법을 대표 발의했다.

사실 이번 상속세 물납제 공론화는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쉽거나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미술품의 물납 대상에서부터 가치 평가, 사후 관리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무엇보다 일부 기업인이나 자산가들의 미술품을 악용한 탈세나 비자금 조성 등으로 인한 부정적인 시각이 만만찮다.

그럼에도 문화 선진국들은 보편적 문화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초석으로 삼기 위해 일찍이 이 법을 도입했다. 영국은 100여 년 전 이 제도를 통해 감히 공공 예산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소장품들을 확보했고, 수많은 문화재와 미술품의 해외 유출을 막았다. 후발 주자인 프랑스는 1983년 상속세는 물론 재산세와 토지세도 예술품으로 내는 물납제를 시행했다. 단순한 조세 형평성의 차원이 아닌, 국민의 예술 향유권을 위해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는 이유다.



보편적 문화복지 실현 위한 초석



특히 상속세 물납제는 지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정부가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미술품들을 상속세로 대신 받은 후 이들을 국립광주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 광주시립미술관 등 전국의 국공립미술관에 ‘돌리게’ 되면 쥐꼬리 예산 때문에 빈약한 수장고가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역의 컬렉터들이 수집한 양질의 미술품을 시민들의 문화 향유를 위한 자산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문화 나들이 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착한 부자’들의 컬렉션으로 거장과 사랑에 빠지는, 그런 ‘봄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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