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충돌
2020년 12월 09일(수) 23:30
홍행기 정치부장 겸 편집부국장
지난 1973년 8월 하순.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총리는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은행 강도에게 붙잡혀 인질이 된 은행 직원 네 명 가운데 한 명인 크리스틴 엔마크(여성·당시 23세)였다. 엔마크는 총리에게 “납치범과 함께 은행을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거절당하자 끝내 불만을 터뜨렸다. “당신은 우리 목숨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인질범들을 충분히 신뢰하고 있고, 절망적이지도 않은 상태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당신(총리)도 알겠지만,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은행 밖 경찰들이 우리를 공격해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민 배제한 그들만의 리그

그해 8월 23일부터 6일간 벌어졌던 ‘스웨덴 스톡홀름 은행 강도 사건’은 사람들에게 ‘권력, 특히 압도적인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특이한 사례였다. 세간에는 ‘인질이 범인과 정서적으로 동조하는 비이성적 심리 현상’을 의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Stockholm syndrome)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은행 강도 사건은 궁극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또는 권력자와 일반 대중 간의 어두운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비롯한 인질 네 명의 생명을 총으로 위협하는 강도들에 대해 분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옹호하는 듯한 엔마크의 발언은 권력 특히 ‘개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권력을 상대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대중 또는 소시민의 불가피한 반응과 현실적인 대응 전략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다.

당시 인질이었다가 경찰에 구출된 엔마크는 사건 발생 20여 년이 지난 뒤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각자가 마주치는 상황에 따라 지금까지 자신이 지니고 있던 가치와 도덕의 기준이 어떤 방향으로 바뀌게 되는 것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자신을 비롯한 인질들이 총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강도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과 전략적인 대응을 했다는 의미다.

‘은행 강도와 인질’ 같은 극단적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 일상을 둘러봐도 ‘압도적인 권력’은 곳곳에 존재한다.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인사권을 행사하는 기업의 대표, 입법·사법·행정부를 대표하는 국회의원·판검사·장관들, 그리고 국정의 수반인 대통령 등이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압도적인 권력’이다. 납치범의 총처럼 타인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들 권력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구체적인 삶의 수준과 방향’을 결정하는 직접적이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적 합의에 따라 정당성이 부여된 몇몇 강력한 권력들이 ‘공정하면서도 신중하게’ 행사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 한국 사회에서 검찰 개혁을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검찰과 정부 및 정치권 간 충돌은 권력의 진정한 주인인 국민을 배제한 채 ‘그들만의 리그’로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목표가 무엇이건, 이들 ‘압도적 권력’의 충돌로 터져 나온 파열음에 국내외 주요 현안들이 일거에 묻히면서 국가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국민 통합에도 빨간불이 켜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스톡홀름 강도 사건의 경우

역사를 돌이켜 보면, ‘통제되지 않는 압도적 권력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개인이나 국민의 동조와 지지 또는 묵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바꿔 이야기하자면 ‘국민의 지지나 묵인이 없다면 압도적인 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국민은 촛불 혁명을 통해 ‘어떠한 권력도 국민 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한 바 있다.

스톡홀름 은행 강도 사건 당시 총으로 무장하고 인질들을 위협했던 올슨(olsson)은 6일간의 인질극 끝에 경찰에 체포된 뒤 이렇게 진술했다. “그것은 인질들의 잘못이다. 인질들은 내가 시킨 모든 것을 다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여기에 있지 못할 것이다. 왜 그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날마다 내가 그들을 죽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들은 마치 염소처럼, 쓰레기 같던 그곳에서 우리(강도들)와 함께 운명 공동체가 되어 갔다. 서로를 알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제 국민 모두가 헌법 1조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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