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 소감의 품격
2020년 02월 12일(수) 00:00
강렬한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관객들의 기립박수 속에 시상대 마이크 앞에 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많은 가능성(potential)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바로 무덤이예요. 늘 사람들은 내게 묻습니다. ‘비올라,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그러면 ‘시체를 발굴해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캐내요’ 라고 말해요. 큰 꿈을 꾸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에 빠진 뒤 실연한 사람들의 이야기…. 전 예술가가 됐습니다. 예술가는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축하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professional)이예요.”

지난 2017년 2월,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펜스’(Fences)에 출연해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비올라 데이비스의 수상 소감이다.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세 차례 후보에 지명된 흑인 배우는 마침내 이날 영예의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위트 넘치는 소감으로 객석의 박수를 이끌어낸 스타도 있다. 지난 2014년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미국 배우 매튜 매커너히다. 흰색 턱시도 차림으로 시상식에 선 그는 “살면서 결코 잊지 않는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가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신),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존재(가족), 내가 쫓을 수 있는 존재(영웅)이다”고 말했다.

“15살 되던 해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너의 영웅은 누구니?’. ‘난 시간을 좀 주세요’라고 대답했어요. 2주후 그가 ‘너의 영웅은 누구니’라고 묻자 ‘10년 후 저예요’라고 했어요. 25살이 되자 그는 ‘이제 영웅이 됐니’라고 묻더군요. 하지만 저는 ‘근처에도 못갔어요’라고 말했죠. 그가 ‘어째서?’라고 묻자 ‘제 영웅은 35살의 저니까요’ 라고 답했어요. 하지만 제 영웅은 늘 저로부터 매일, 매주…10년이나 멀어져 있었어요. 아마 전 ‘영웅’이 되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할테니까요.”

매년 연말이면 누구인지 잘 알지도 모르는 이에게 감사 인사로 시작해 감사 인사로 끝나는 국내 영화제나 방송 대상 시상식의 수상 소감과는 ‘클래스’가 다르다.

엊그제 한국 최초로 아카데미 4관왕 수상이라는 기념비적인 쾌거를 이룬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소감이 잔잔한 여운을 주고 있다. 지난달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명언으로 화제를 모은 그는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에서 허락한다면 이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서 (다른 후보 감독들과 함께) 오등분 해 나누고 싶다”고 말해 웃음과 환호를 받았다. 각본상을 받은 후에는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사실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이다. 국가를 대표해서 쓰는 건 아닌데, 이 상은 한국이 받은 최초의 오스카상”이라고 말해 감동을 선사했다. ‘기생충’에 이은 또 하나의 아카데미상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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