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대종사와 13대강사 : “조선 중기 이후 뛰어난 선승과 교학승을 배출한 요람”
학덕과 수행이 높은 스님 ‘대종사’
경론 가르치는 뛰어난 강사 ‘대강사’
탁월한 대사·고승들의 법통·법맥
오늘날의 ‘명찰’ 대흥사 만들어
2019년 10월 02일(수) 04:50
해남 대흥사는 대명찰답게 학덕과 수행을 겸비한 13인의 대종사와 경론에 뛰어났던 13인의 대강사를 배출했다. 유네스코가 대흥사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것은 그러한 학맥과 법통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시나브로 시월이다. 머잖아 만산이 물들고 곡식이 익어갈 것이다. 그러나 때늦은 태풍으로 농심(農心)은 천근만근이다. 누군가 그러하였다. 자연은 ‘중도’(中道)라고.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게 자연의 생리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게 자연의 순리고 섭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늘 가치판단과 가치범람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사생결단식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도 그 이유다. 사람 사는 세상에 가치판단이 왜 없으랴 만은 더러는 자연과 같은 이치가 부러울 따름이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은 궁즉통(窮則通), 통즉변(通則變), 변즉구(變則久)로 수렴된다. 무엇이든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변하고, 변하면 오래가는 법이다. 이치를 알면 단순하거늘, 그러나 탐심과 집착은 지고한 진리마저 외면하게 한다.

해남 대흥사(주지 법상)에 들어서면 머리가 비워지는 느낌이다. 맑아진다. 명징한 사계가 그곳에 있어 가끔은 물아일체가 된다. 고색창연의 문화도 좋지만 청정무구한 자연이 주는 가르침이 더없이 좋다. 어두웠던 눈이 뜨이고 닫혀 있던 귀가 열린다.

대흥사가 오늘의 대찰, 명찰이 된 것은 대사(大師)와 고승(高僧)들의 법통과 법맥 때문이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지정은 역사적 내력과 유형의 문화재를 뛰어넘는 정신적 유산에서 비롯됐다. 눈에 보이는 형상 못지않게 주춧돌이 되는 참선과 강론 등 무형의 자산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대흥사가 배출한 대종사와 대강사. <대흥사 제공>


대흥사에는 모두 13대종사와 13대강사가 있다. 조선 이후 학덕과 수행에 뛰어난 스님들을 많이 배출했다는 방증이다. 수관 스님은 “대흥사는 조선 중기 이후 선교양종의 대도량으로 이름을 떨친 대사찰이다. 조선 중기 이후의 불교는 넓게는 선교양종도총섭이었던 서산대사의 문도라고 할 수 있다”며 “조선 중기 이후 뛰어난 선승과 교학승을 배출한 요람”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대종사는 산문에 든 지 40년 이상의 스님으로, 학덕이 높고 수행이 탁월한 스님을 일컫는다. 대강사는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뛰어난 강사를 지칭하는데 강백(講伯), 대강백(大講伯)이라고 부른다. 다음은 13대종사와 대강사에 대한 소개로, 대흥사 홈페이지를 참조해 요약한 부분이다.



◇13대종사

▲풍담 의심(1592~1665)=청허 휴정대사의 문하인 기암 법견스님과 소요 태능스님 등을 찾아 보고, 금강산과 보개산 등에서 언기선사의 부탁으로 ‘화엄경’, ‘원각경’ 등 대승경전을 연구해 음석(音釋)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쳤다.

▲취여 삼우(1622~1684)=얼굴빛이 붉고 윤택하여 해운스님이 ‘술취해 있는 사람’(醉如子)이란 뜻으로 취여라는 별호를 내렸다. 담론을 잘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는 마력를 지니고 있었다. 화엄의 종지를 부연 설명하는 법회에 수백 명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화악 문신(1629~1707)=성은 김씨로 전남 해남의 화산 사람이다. 대흥사를 떠나 제방 선지식들을 찾아 명산을 돌아다니며 미완성의 지식을 탁마한다. 그 후 취여선사로 부터 청허→소요→해운 종사로 전해지는 법맥을 이어 받았다.

▲월저 도안(1638~1715)=27세 때 묘향산에 들어가 ‘화엄경’의 대의를 강의하였는데 사람들은 스님을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 불교 뿐 아니라 백가(百家)의 모든 책에 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며 대승의 여러 경전들을 간행 배포하는 등 교화의 일선에서도 활약했다.

▲설암 추붕(1651~1706)=성은 김(金)씨로 평안남도 강동(江東) 사람이다. 지은 과문의 원이름은‘선원제전집도서과평’으로 2권이 모두 현존하며 다른 하나는 ‘법집별행록절요사기’다.

▲환성 지안(1664~1729)=15세 때 미지산 용문사로 출가했고 상봉정원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7세 때 금강산을 순방하여 월담설제선사를 찾아 법맥을 이어받은 뒤, 침식을 잊고 경전을 연구했다.

▲벽하 대우(1676~1763)=성씨는 박씨로 전남 영암 사람이다. 잉태될 때부터 특이한 조짐을 보였던 스님은 뒷날 새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출가를 결심, 마침내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설봉 회정(1678~1738)=9세에 달마사의 조명장로를 찾아가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 16세에 머리를 깎고 마침내 도예를 떨치던 화악문신 대사를 찾아가 대사로 부터 법통을 전해 받았으며 외딴섬에 들어가 토굴에서 철저히 정진하기도 했다.

▲호암 체정(1687~1748)=성씨는 김씨로 전북 고창군 흥양 사람이다. 환성스님에게 법통을 이어받고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주로 주석했는데 따르는 스님이 수백 명에 달했다.

▲상월 새봉(1687~1767)=순천 사람이다. 영조 43년(1766) 10월, 81세에 “물은 흘러 바다로 돌아 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하고는 담담하게 입적했다.

▲함월 해원(1691~1770)=어머니 조씨는 꿈에 큰 물고기를 보고 잉태해 열달이 훨씬 지나 아이를 낳았다. 스님이 된 이래 두루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탁마했으며 뒷날 환성 스님을 섬기게 되었는데 입실 10년만에 종문의 묘전을 모두 배웠다.

▲연담 유일(1720~1799)=조선 후기의 고승. 화순 출신으로 5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10세에 ‘통감’, 12세에 ‘맹자’를 읽었다.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을 전수함으로써 선교(禪敎)의 총본산인 해남 대흥사의 대종사(大宗師) 중 1인이 되었다.

▲초의 의순(1786~1866)=초의선사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이자 다도(茶道)를 정립했다. 정약용, 김정희 등과 폭넓게 교류했으며 시부를 익히기도 하고, ‘동다송’을 지었다.



◇13대강사

▲나암 승제(1629~1707)=화순군 능주면의 쌍봉사 사람으로, 설담자우 스님 법을 이은 제자다.

▲운담 정일(1678~1738)=대흥사 정진당에서 강의를 열었으며 ‘운담시문집’을 저술했다.

▲연해 광열(생몰연대 미상)=성격이 호탕하고 소탈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전해온다.

▲영곡 영우(생몰연대 미상)=강회의 장엄함이 부처님 영산법회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벽담 행인(1687~1748)=서산의 법제인 부휴의 후예로 ‘고기’에 따르면 영해스님의 법손이다.

▲퇴암 태관(1687~1767)=성품이 엄준해 고요한 곳을 찾아 참선을 즐겼다고 전해온다.

▲낭암 시연(1789~1866)=조선조 후기 불교사에 학문의 꽃을 피운 13대 강백의 한 분이다.

▲금주 복혜(1691~1770)=아암 혜장스님으로부터 “종풍을 드날린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만화 원오(1694~1758)=호암 제정스님을 모시고 경론을 배워 경전의 깊은 뜻에 통달했다.

▲영파 성규(1728~1812)=슬기로움이 뛰어나 학문에 통달하고 글씨도 뛰어났다는 평이다.

▲완호 윤우(1758~1826)=전남 해남군 별진 사람으로 연담 유일스님에게 선학을 배웠다.

▲아함 혜장(1782~1811)=박학과 달변으로 명성을 떨쳐 30세부터 청풍당에서 법회를 열었다.

▲범해 각안(1820~1896)=저서로 ‘동사열전’ 6편 1책을 비롯해 모두 20여 편이 있다.

꽃이 지기 직전의 배롱나무.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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