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장 호남 의병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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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國家安危在頃刻 )/ 의기 남아가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意氣男兒何待亡)···” 나주 출신 죽봉 김태원(1870~1908) 의병장이 아우인 청봉 율에게 1908년 2월에 보낸 시 ‘여사제심서’(與舍弟心書)의 일부다. 형제는 나란히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1907년 10월, 장성군 황룡면에 위치한 수연산 석수암에서 결성된 의병 연합부대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참가했다.
형제는 담양 무동촌(담양군 남면 무동리)을 비롯해 함평·영광·장성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싸웠다. 사람들은 형님 부대를 ‘참봉진’(參奉陳), 아우 부대를 ‘박사진’(博士陳)이라 불렀다.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죽봉은) 기발한 전략을 많이 사용하여 많은 일병(日兵)을 살해했다”고 기록했다. 형제는 1908년 4월 광주 어등산에서 순국했다. 광주시 서구 농성광장에는 화승총을 든 김태원 의병장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의열공 학봉(鶴峯) 고인후 선생 14대 종손인 고영준(80) 씨의 창평 유천리 종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로 종가를 찾는 이들은 의병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를 비롯해 의병 후손들인데, 도올 김용옥 선생과 이낙연 총리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학봉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제봉 고경명 선생의 둘째 아들로, 금산전투에서 부친과 함께 순절했다. 장남인 준봉 고종후 역시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절했다.
그리고 300여 년이 흐른 구한말에 학봉가 11대 종손인 녹천(鹿川) 고광순 선생이 의병을 일으켰다. 한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또한 같은 시기 일제에 대항해 총칼을 드는 대신 교육에서 독립의 빛을 찾으려 했던 애국 계몽 사상가 춘강(春崗) 고정주 선생까지 더하면 가문의 역사는 살아 있는 한편의 대하소설이자 독립운동사라 할 수 있겠다.
광주시와 전남도가 의병 관련 기념 공간을 건립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광주시는 ‘호남의병기념관’ 건립 타당성 조사와 함께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진행하고 있고, 전남도 역시 ‘남도의병 역사공원’ 기본계획과 타당성 연구 용역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시와 전남도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호남에서 일어났던 의병을 ‘광주 의병’과 ‘전남 의병’과 같이 지역을 기준으로 쪼개 나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 지역의 의병을 빼놓고 이순신 장군을 얘기할 수 없다”고 한다. 구한말 호남 의병 또한 참여 인원수나 전투 횟수에서 타 지역보다 높은 비중을 보인다. 1909년의 경우 호남 의병 수는 전국의 60.1%, 교전 횟수는 47.3%나 되었다.
의병부대의 활동 지역은 어느 한 곳에 한정되지 않았다. 죽봉 김태원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의 경우 어등산뿐만 아니라 영광과 법성포, 함평, 장성 등 지역을 넘나들며 싸웠다.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지만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소단위 독립부대로 나누고 합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의병들은 ‘둔한 화승총’과 ‘무딘 칼날’로 현대식 소총과 대포를 갖춘 일본 군경을 상대하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폈다. 녹천 부대가 지리산 연곡사에 아지트를 마련한 것도 장기전에 들어가기 위한 포석이었다.
광주시와 전남도는 각자 ‘호남 의병 기념관’과 ‘남도 의병 역사공원’을 세울 것이 아니라 ‘호남의병’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고 널리 알리는 사업에 먼저 나서야 한다. 청사(靑史)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의병장과 무명 의병들을 발굴해야 한다.
무엇보다 화순 ‘쌍산의소’(雙山義所)처럼 광주와 전남 지역에 산재한 호남 의병 전적지를 역사 교육의 대상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현장에서 ‘생생한 역사’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고영준 씨는 타 지역 의병 후손이나 연구자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한다. 그래서 경남 하동에서도 녹천부대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구한말 의병은 녹천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홍범도 부대에 백두산 포수가 있었던 것처럼 녹천의진에 지리산 포수 출신인 박매지가 함께 활동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향토사학자인 정재상(경남 독립운동연구소장) 씨가 지난 2017년 문건을 발굴해 밝힌 사실이다.
광주시와 전남도가 추진하는 의병관련 기념관이나 공원은 한 곳으로 단일화해야 한다. ‘호남 의병’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호남 의병’을 널리 알리기 위해 광주시와 전남도는 손을 마주 잡아야 한다.
/song@kwangju.co.kr
#의열공 학봉(鶴峯) 고인후 선생 14대 종손인 고영준(80) 씨의 창평 유천리 종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로 종가를 찾는 이들은 의병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를 비롯해 의병 후손들인데, 도올 김용옥 선생과 이낙연 총리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학봉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제봉 고경명 선생의 둘째 아들로, 금산전투에서 부친과 함께 순절했다. 장남인 준봉 고종후 역시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순절했다.
광주시와 전남도가 의병 관련 기념 공간을 건립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광주시는 ‘호남의병기념관’ 건립 타당성 조사와 함께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진행하고 있고, 전남도 역시 ‘남도의병 역사공원’ 기본계획과 타당성 연구 용역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광주시와 전남도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호남에서 일어났던 의병을 ‘광주 의병’과 ‘전남 의병’과 같이 지역을 기준으로 쪼개 나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 지역의 의병을 빼놓고 이순신 장군을 얘기할 수 없다”고 한다. 구한말 호남 의병 또한 참여 인원수나 전투 횟수에서 타 지역보다 높은 비중을 보인다. 1909년의 경우 호남 의병 수는 전국의 60.1%, 교전 횟수는 47.3%나 되었다.
의병부대의 활동 지역은 어느 한 곳에 한정되지 않았다. 죽봉 김태원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의 경우 어등산뿐만 아니라 영광과 법성포, 함평, 장성 등 지역을 넘나들며 싸웠다.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지만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소단위 독립부대로 나누고 합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의병들은 ‘둔한 화승총’과 ‘무딘 칼날’로 현대식 소총과 대포를 갖춘 일본 군경을 상대하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폈다. 녹천 부대가 지리산 연곡사에 아지트를 마련한 것도 장기전에 들어가기 위한 포석이었다.
광주시와 전남도는 각자 ‘호남 의병 기념관’과 ‘남도 의병 역사공원’을 세울 것이 아니라 ‘호남의병’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고 널리 알리는 사업에 먼저 나서야 한다. 청사(靑史)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의병장과 무명 의병들을 발굴해야 한다.
무엇보다 화순 ‘쌍산의소’(雙山義所)처럼 광주와 전남 지역에 산재한 호남 의병 전적지를 역사 교육의 대상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현장에서 ‘생생한 역사’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고영준 씨는 타 지역 의병 후손이나 연구자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한다. 그래서 경남 하동에서도 녹천부대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구한말 의병은 녹천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홍범도 부대에 백두산 포수가 있었던 것처럼 녹천의진에 지리산 포수 출신인 박매지가 함께 활동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향토사학자인 정재상(경남 독립운동연구소장) 씨가 지난 2017년 문건을 발굴해 밝힌 사실이다.
광주시와 전남도가 추진하는 의병관련 기념관이나 공원은 한 곳으로 단일화해야 한다. ‘호남 의병’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호남 의병’을 널리 알리기 위해 광주시와 전남도는 손을 마주 잡아야 한다.
/song@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