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몰락과 호남 정치
[임동욱 서울취재본부장]
2018년 06월 20일(수) 00:00
6·13 지방 선거는 ‘보수의 몰락’으로 귀결됐다.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진영은 17개 광역 단체장 선거에서 대구시장과 경북 지사 두 곳에서만 승리했다. 미니 총선급인 12곳의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는 단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했다. 전국 226곳의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는 56곳에서만 당선자를 냈다. 수도권에서도 66곳 가운데 6명(서울 1명, 경기 4명, 인천 1명)이 당선되는 데 그쳤다.

보수의 전통적 ‘텃밭’인 영남에서조차 민심 이반을 막지 못했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에서는 39명의 기초 단체장 가운데 민주당이 절반이 넘는 25명의 당선인을 냈다. 부산과 울산은 역대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기초 단체장이 한 번도 당선된 적 없는 지역이다. 보수 진영은 대구·경북에서만 겨우 정치적 존립 근거를 마련하는 데 그친 것이다. 이는 역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결과다. 원내 3당으로서 중도와 합리적 보수를 아우른다고 애써 주장하는 바른미래당은 광역 단체장, 국회의원 보궐 선거, 기초 단체장 선거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보수의 몰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낡은 사고방식에 있다. 지난 총선과 대선의 패배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낸 촛불 민심의 역동성을 간과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따뜻한 보수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과거의 질서에 머물렀다.

특히, 남북 정상 회담으로 시작된 ‘한반도 평화’의 흐름에 대한 보수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위장 평화 쇼’라는 자유한국당의 주장은 오히려 강한 역풍을 불렀다. 사회 전반의 평화와 공존의 흐름을 외면하며 구시대적인 냉전과 성장의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 선거 기간 ‘나라를 통째로 넘기겠습니까’라는 슬로건으로 ‘문재인 정부 심판론’을 내세웠으니 보수 진영의 참패와 몰락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이 같은 민심의 쓰나미에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사퇴한 것은 물론 소속 의원들은 국회 로텐더 홀에서 무릎을 꿇은 채 사과문을 발표했다. 또 당 해체론과 함께 제 3지대에서의 보수 재편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벌써부터 혁신의 대상과 주체를 놓고 내홍이 불거지고 있어 쓴웃음만 나오는 형국이다.

특히, 이번 지방 선거는 사회적 변화 흐름이 명확하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민심은 냉전적 이념 구도에서 벗어나 실리와 공생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영남 지역주의와 과거 기득권에 뿌리를 둔 보수 리더십의 퇴장과 함께 이념적 지향 변화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정치적 좌표 설정과 인적 청산의 화두를 해결하지 않고는 보수의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변혁은 이제 보수의 생존 조건이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보수의 몰락은 호남 정치 현실에 비추어 봐도 시사점이 크다. 새로운 리더십과 비전 부재 현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호남 민심의 지지로 출범한 국민의당은 지난 총선 승리로 창출한 ‘제3의 길’을 결국 지켜 내지 못했고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열, 지방선거 참패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호남 중진들의 반목과 정치력 부재, 초·재선 의원들의 무기력은 보수 진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호남의 민주당 진영도 마찬가지다.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들은 문풍(문재인 바람)에 기대어 토론회마저 기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천은 당선’이라며 최소한의 비전 제시도 외면한 것이다. 민주당 후보들이 광역·기초 의원을 거의 싹쓸이하면서 민주당 소속 단체장을 제대로 견제하겠느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 바람에 따른 ‘묻지 마 지지’로 자격 미달의 후보들이 당선됐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오는 8월 민주당 대표 경선을 앞두고 지역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유력 주자에 줄을 서는 구태도 재현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은 ‘민주·진보 진영의 심장’이었던 호남 정치의 종속화 등 퇴행을 가속시키지 않느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에 따라 21대 총선에서 호남 정치권은 세대교체를 바탕으로 창조적 해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역과 정파를 넘어 시대적 의제를 선점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들을 발굴하고 키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바닥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고난의 행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정권 불임 지역’이라는 한계를 넘어서고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호남 민심의 지속적이고 냉엄한 감시와 호남 정치권의 분발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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