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와 문화 광주
2017년 01월 18일(수) 00:00
박 진 현 편집부국장·문화선임기자
“할리우드는 이방인과 외국인들로 가득한 곳이다. 만약 그들을 쫓아낸다면, 우리는 예술이 아닌 미식축구나 종합격투기만 보게 될 것이다.” 제74회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열린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LA 베벌리힐튼호텔.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평생공로상을 받은 메릴 스트립의 묵직한 수상 소감이 울려 퍼졌다. 대선 후보 시절에 불법 이민자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을 향한 일침이었다.

이날 스타들의 수상 소감에서 기자의 마음을 유독 사로잡은 건 영화 ‘라라랜드’(La La Land)로 뮤지컬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엠마 스톤이었다. LA에서 따온 듯한 ‘라라랜드’는 꿈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는 뜻으로 올해 뮤지컬 부문 골든글러브 7관왕을 차지했다. 엠마 스톤은 영화의 ‘오디션 신’을 떠올리게 하는 비장한 어조로 젊은 예술인들을 향해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 “눈앞에서 문이 ‘쾅’ 닫히는 경험을 한 젊은 예술인 여러분, 이 영화를 통해 포기하고 싶은 순간 다시 일어날 힘을 얻으세요.”

영화의 줄거리는 고전적이다. 20대 중반의 미아는 배우의 꿈을 안고 시골에서 할리우드로 이사 온 커피숍 종업원. 어린 시절 영화를 좋아했던 이모의 영향을 받아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뒤 5년째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 커피숍 ‘알바’(아르바이트)는 오디션을 위한 생계 수단일 뿐.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다. 힙합이나 전자음악에 밀려나는 재즈클럽을 도심에 여는 게 소원이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주변의 우려에 “위기는 인생이 내게 던지는 펀치다. 피하지 않고 맞서다 보면 카운터펀치를 날릴 순간이 올 것”이라며 꿈을 키워 간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현실은 좀처럼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세바스찬은 밀린 방세를 내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하느라 바쁘고 미아는 2∼3분도 주어지지 않는 ‘오디션 투어’(?)에 점점 지쳐 간다. 급기야 오디션에 염증을 느낀 미아. 자신의 이름을 걸고 1인극을 무대에 올리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나자 짐을 싸 들고 시골집으로 내려간다.

그러던 어느 날, 미아는 1인극에서 그녀의 연기를 눈여겨본 영화 관계자로부터 마지막 오디션을 제안받는다. 핀 조명이 내리꽂는 오디션 무대, 그녀는 어린 시절 이모와의 추억으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꿈을 찾아 파리로 떠난 이모는 추운 겨울날, 맨발로 센강에 뛰어들었다가 한 달 내내 기침을 달고 살았어요. 사람들이 바보 같다고 놀렸지만 이모는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대도 그렇게 할 거래요. ‘무언가에 살짝 미쳐 살아 본다는 건 새로운 빛깔로 세상을 보는 비결’이래요. 화가와 시인들이 세상을 바꾸는 힘도 거기에 있다면서….”

정유년 새해, 아름다운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라라랜드’가 관객 300만 명을 육박하며 흥행 중이다. 뮤지컬 영화로는 극히 이례적이다. 특히 젊은 층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꿈꾸기조차 버거운 현실과 고군분투 중인 요즘 2030세대들의 대리만족이 반영된 듯하다.

하지만 영화는 열정을 잃지 않는 예술가들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요즘 ‘블랙리스트’로 뒤숭숭한 한국의 문화예술계와 오버랩된다. 박근혜 정부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인들을 가려내 지원 대상에서 배제시켜 왔기 때문이다.

사실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매년 정부 예산과 기금으로 문학, 미술, 연극, 무용 등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은 예술인이나 단체엔 ‘가뭄에 단비’와 같은 존재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예술인들의 수입으로는 작품 활동을 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광주전남연구원이 발표한 ‘2016년 광주 지역 예술인 실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9.7%가 평균 연간소득이 999만 원 이하였으며 절반가량이 생업을 위해 작업실을 떠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런데도 가난한 예술인들을 지원하기는커녕 개인적 정치 성향이나 과거 활동을 트집 잡아 돈과 권력으로 길들이려고 했다니.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참 나쁜’ 정부다.

모름지기 문화 선진국과 도시는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북돋워 주는 정책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시민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고 도시의 품격을 높이는 공공재가 바로 예술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부디 올해는 예술인이 ‘라라랜드’에서 자신들의 꿈과 열정을 키워가고, 그리하여 행복한 삶을 누렸으면 좋겠다. 덧붙여 혹여 잇단 시련으로 좌절에 빠진 예술인들이나 젊은이들이 있다면, 잊지 마시라. 언젠가 ‘결정적 한 방’을 날릴 인생의 순간이 온다는 것을.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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