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서점과 ‘소년의 서(書)’
김 미 은
문화1부장
2016년 10월 19일(수) 00:00
“그날,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모두가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지, 우리가 꿈꿨던 거, 갈망했던 거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리들 목숨을 포함해서요.”

물기 어린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유난히 마음에 남는 대목이 있다. 대개는 어떤 의미 있는 단어나 특별한 에피소드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데, 그녀와의 인터뷰에서는 이상하게 ‘잠시’라는 단어가 가슴에 깊이 남았다. 그녀가 말하는 ‘그날’은 전남도청이 진압된 1980년 5월 27일 새벽이다.

그녀, 정현애 전 광주시의원은 ‘녹두서점’ 주인이다. 남편 김상윤(윤상원열사 기념사업회 이사장)과 계림동 헌책방 거리에 서점 문을 연 게 1977년. 녹두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었다. 광주사회운동의 거점이었고, 사회 변혁을 꿈꾸던 이들의 아지트였다. 1980년에는 오월 항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갔고, 1981년 문을 닫을 때까지 끊임없이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2016 광주비엔날레’의 화제작 중 하나는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이다. 스페인 작가 도라 가르시아는 부부에게 편지를 보내 협조를 구했고, 리서치 작업도 진행했다. 35년 만에 녹두서점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서점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붉은 전봉준 액자, 함께 읽으며 공부했던 책들이 꽂힌 책장, 꽃과 과일, 태극기로 덮인 관, 바닥에 관처럼 짜 넣은 책장 등이 인상적이다.

작품이 완성되기 전 ‘광주, 시간 속으로 시리즈’를 통해 두 차례 ‘녹두서점’을 다뤘다. 부부에게 긴 이야기를 듣고 50여 매 가까운 기사를 쓰며 의외의 사실에 놀랐다. 첫째는 서점을 운영했던 기간이 아주 짧았다는 점, 또 하나는 사진, 일기 등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는 누구도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던 시절이었단다. 계엄군에게 남편이 끌려간 후 정 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서점을 찾은 이들의 이름이 담긴 외상 장부를 없애는 일이었다.

실제로 만난 작품은 솔직히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못 미친 듯해 아쉬웠다. 숱한 이야기와 의미를 품고 있는 녹두서점을 구현한 방식이 조금은 단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녹두서점’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는 점이나, 도슨트 해설 때 관객들이 서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겉모습만 훑어보고 가는 것도 아쉬웠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녹두서점을 다시 기억 속에서 불러내 준 게 경이롭고, 작가에게 감사하다”던 정 씨의 말처럼 누구도 기억하지 않았던 존재를 다시 소환해 준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많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남녘서림, 황지서점, 청년글방, 백민서점 등 시대와 호흡했던 사회과학 서점들과 함께.

이번 작품이 광주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 새로운 서점이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극 연출가이자 독립 문화기획자 임인자 씨가 광주극장 옆 골목에 오픈할 ‘소년의 書’다. ‘인문사회과학예술 서점’을 표방한 이곳에서는 지금은 절판이 된 오월 서적들과 연극 관련 서적,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판매한다. 헌책이 80% 정도로 한때 금서였던 책들은 한곳에 모아 두었다. 책장에 꽂힌 1500여 권의 책을 살펴보니 ‘녹두서점’의 서가가 어른거린다.

몇 년 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함께 ‘도시횡단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그녀는 당시 ‘오월 광주’를 다시 공부했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기에 5·18에 대해 많이 안다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다음 세대들이 오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지금은 ‘오월길 해설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녀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다. 며칠 전에는 서울 대학로에서 검열 사태에 맞선 릴레이 연극 ‘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에도 참여했다. 그녀는 ‘제도에서 밀려나고 배제된 사람들’에 대해 발언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왔다. 그게 바로 문화와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서점을 오픈한 이유도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을 넘어 그런 논의들이 진행되는 공간을 꿈꾸어서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한발 전진하는 것, 과거와 현재·미래를 잇는 연결 고리가 되는 것, 그게 ‘소년의 書’의 모토다.

녹두서점은 전시가 끝나고 나면 해체돼 사라져 버릴 터다. 어느 공간에서든 그 흔적들을 다시 만나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비엔날레는 오는 11월 6일까지 계속된다.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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