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찾는’ 문화전당이 되려면
차별화로 성공한 ‘GMMF’
2015년 07월 29일(수) 00:00
고등학교 교사인 기자의 지인은 누구보다도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린다. 학생도 아닌 그녀가 여름방학을 학수고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대관령 국제음악제(Great Mountains International Music Festivals & School·이하 GMMF) 때문이다. 방학 기간인 매년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 1주일간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과 야외음악당에서 펼쳐지는 음악제는 그녀 같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겐 ‘놓칠 수 없는’ 축제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공동 예술감독인 첼리스트 정명화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가 내놓는 참신한 주제와 세계 정상급 음악가들의 환상적인 연주가 관객들에게 ‘한여름 밤의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최근엔 ‘클래식=마니아’라는 편견을 깨뜨리면서 일부 프로그램의 경우 티켓 오픈이 공지되자마자 매진될 정도다.

지난 2004년 창설된 GMMF가 짧은 역사에도 ‘믿고 보는’ 축제로 성공한 원동력은 참신한 기획과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이다. ‘자연의 영감’ ‘평창의 사계’ ‘춤에서 춤으로’ 등 매년 행사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는 독특한 테마와 창의적인 프로그램들이 어우러져 고품격 음악제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차세대 음악가와 음악 영재를 발굴해 키우는 ‘인큐베이팅’은 GMMF를 ‘아시아의 넘버 원’으로 자리매김시킨 핵심 콘텐츠다. 단순히 음악가들의 연주를 감상하는 콘서트는 많지만 마스터 클래스, 실내악 레슨, 찾아가는 음악학교 등을 운영하는 음악제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음악제의 영문 표기에 ‘School’을 명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난 2011년 취재차 방문한 싱가포르의 에스플러네이드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세계적인 복합문화공간인 에스플러네이드는 한해 평균 430억 원의 예산(전체 700억 원·2013년 기준)을 아끼지 않는 싱가포르 정부의 ‘통 큰’ 지원 덕분에 다문화 국가의 특성을 반영한 색깔 있는 콘텐츠를 선보여 왔다. 규모에 걸맞게 연간 12개의 축제와 21개의 시리즈, 외국의 유명 예술단 순회공연 등 자체 기획과 대관까지 포함하면 수백여 개의 프로그램이 무대에 오른다. 그중에서도 ‘에스플러네이드 기획’(The Esplanade Presents)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자체 제작 프로그램은 ‘믿고 보는’ 무대로 통한다. 서구권의 유명 뮤지컬이나 오케스트라 공연들과의 치열한 티켓 경쟁에서도 늘 우위를 차지할 정도로 시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소비자들이 샤넬이나 루이뷔통의 로고를 보고 가방을 구매하듯 ‘에스플러네이드 기획’은 관객들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이는 명품 브랜드다.

앞으로 30여 일 후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이하 문화전당)이 역사적인 개관(9월4일)을 하게 된다. 지난 2005년 첫 삽을 뜬 지 꼭 10년 만이다. 이쯤이면 지역 사회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어야 하건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세계적인 복합문화시설을 품에 안게 됐다는 설렘보다는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단일 건물로는 국내 최대(4만8774평)라는 스케일이 무색하게 직제와 인력이 대폭 축소됐고 개관 콘텐츠 역시 극히 일부만 준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광주가 두려워하는 건 ‘아시아 문화 허브‘로서의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문화전당의 ‘필살기’는 아시아 문화의 창작과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문화 플랫폼인데, 현 상황에선 문화 발신지는커녕 자칫 ‘무늬만 국내 넘버 원’이 되지 않을까 해서다. 특히 문화전당의 성패를 가를 핵심 공간인 문화창조원의 ‘불안한’ 출발은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전임 감독의 중도 하차로 애초 전시 계획이 대폭 수정된 데다 ‘예산만 축내는 지역 사업’으로 여기는 현 정부의 부정적인 시각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개관도 하기 전에 일각에선 연간 수백억 원이 소요되는 콘텐츠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문화창조원의 창·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선 콘텐츠 기획, 제작, 시연(test bed), 상품화까지 막대한 예산과 시일이 담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광주는 ‘문화로 먹고 사는 세상’을 꿈꾸며 문화전당의 개관에 올인해 왔다. 따라서 문화전당의 실패는 곧 지역사회에겐 끔찍한 악몽이자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지속 가능한 문화발전소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면 희망은 있다. 여느 복합문화공간에선 찾아보기 힘든 문화전당의 경쟁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전향적인 자세와 지원이 시급한 이유다.

/jhpark@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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