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인문학 입문 - 김형중 조선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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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변보다 눌변을 신뢰하고, 장광설보다 짧은 독설을 선호하는 편이다. 가령 책 아무 데나 펼쳐 봐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에밀 시오랑의 이런 문장들……. “프로메테우스가 요즘 시대에 살았더라면 야당 국회의원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진화이다“(독설의 팡세). “원하는 순간에 자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때만,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하게 된다”(태어났음의 불편함). 키득키득, 통쾌발랄! 이런 견유주의가 따로 없다. 싫증을 잘 내는 편인 나이지만, 그래서 그의 책들만은 항상 손 닿을 만한 곳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 보곤 한다. 키득거리기 위한 독서라니, 누군가에게는 악취미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내겐 이런 루틴도 있다. 내 연구실이 있는 층에 남자는 나 하나여서 남자 화장실을 거의 혼자 사용한다. 그곳에는 소변기가 여섯 개 설치되어 있는데(그 중 하나는 고장이다), 벽의 눈높이쯤에 이런 잠언들이 붙어 있다. “한가한 인생과 할 일 없는 인생은 다르다”. “믿음은 산을 움직인다”. “인간은 자기 의지에 따라 위대해지기도 하고, 보잘것없어지기도 한다”. 진부함이 곧 악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에 백 퍼센트 동의하는 편이니, 나는 저런 문장들 뒤에 몇 마디 덧붙여 그 진부함을 악의적으로 비웃어 주곤 한다(거의 자동적이다). “한가한 인생과 할 일 없는 인생은 다르다. 물론 실업률이 0%일 때 말이지만”. “믿음은 산을 움직인다. 산이 인간에게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에 따라 위대해지기도 하고, 보잘것없어지기도 한다. 불가사의한 것은 그런데도 도대체 왜 인간의 역사는 이토록 보잘것 없느냐는 점이다”.
연상은 꼬리를 문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런데 너무 일찍 죽은 이상이나 고흐는 그런 사실을 알았을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 문제는 절대정신이 개화하고 헤겔 자신이 죽은 후에도 황혼이 매일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단 아버지의 재력이 뒷받침되는 경우에만”. “대나무는 휠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 때리는 회초리가 된다”. 등등.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주제에 좀 이상한 루틴이긴 하지만, 그렇게 삐딱하기만 해서야 되겠냐고 나무라지는 말아줬으면 싶다. 좀 과장되게 말해 나는 저런 루틴이 일종의 ‘인문학 입문’이라고 생각한다. 화장실에서도 유행하는 저와 같은 잠언들은 사실 알고 보면 ‘이데올로기’의 결정체다. 일하면서도 한가한 삶을 영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한가한’ 삶과 ‘할 일 없는’ 삶 사이에 가치의 위계를 도입하는 순간,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순식간에 루저가 된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라고 다독이는 순간, 실패의 원인은 실패를 양산하는 사회적 구조로부터 개인의 의지 문제로 옮겨간다. 실패의 개인화, 노역의 신성화, 이것들은 분명 신자유주의가 선호할 만한 이데올로기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세계와 맺는 상상적 관계다”. 좀 풀어서 말해보자.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타인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알튀세르에 따를 때, 문제는 그 관계가 실제적이지 않고 ‘상상적’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세계 속 자신의 위치를 잘못 파악한다.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수천 년 전 박달나무 아래 나라를 세웠다는 단군이 우리에게 ‘실제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삐딱한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단군은 ‘상상적으로’는 건재한데, 왜냐하면 그의 이름 앞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는 ‘우리’, 혹은 ‘(혈통에 기반한) 단일 민족’으로 호명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민족주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거주하는 개인들이 단군과 맺은 상상적 관계”다.
그뿐일까? ‘소확행’은 “크게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행복’과 맺은 상상적 관계”다. ‘치유의 인문학’은 “항상적으로 치유가 필요한(즉 항상적으로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그럴싸한 달변과 맺은 상상적 관계”다. 헌법은 “한 번도 만인이 법 앞에 평등했던 적이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국가와 맺은 상상적 관계”다. 보험은 “확률상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불행 앞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자본과 맺은 상상적 관계”다. 등등.
진부한 잠언들이 붙어 있는 화장실에 들를 때마다 내가 ‘인문학 입문서’ 앞에 서 있다고 느끼는 이유가 이렇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주제에 좀 이상한 루틴이긴 하지만, 그렇게 삐딱하기만 해서야 되겠냐고 나무라지는 말아줬으면 싶다. 좀 과장되게 말해 나는 저런 루틴이 일종의 ‘인문학 입문’이라고 생각한다. 화장실에서도 유행하는 저와 같은 잠언들은 사실 알고 보면 ‘이데올로기’의 결정체다. 일하면서도 한가한 삶을 영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한가한’ 삶과 ‘할 일 없는’ 삶 사이에 가치의 위계를 도입하는 순간,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순식간에 루저가 된다.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라고 다독이는 순간, 실패의 원인은 실패를 양산하는 사회적 구조로부터 개인의 의지 문제로 옮겨간다. 실패의 개인화, 노역의 신성화, 이것들은 분명 신자유주의가 선호할 만한 이데올로기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세계와 맺는 상상적 관계다”. 좀 풀어서 말해보자.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타인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알튀세르에 따를 때, 문제는 그 관계가 실제적이지 않고 ‘상상적’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세계 속 자신의 위치를 잘못 파악한다.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수천 년 전 박달나무 아래 나라를 세웠다는 단군이 우리에게 ‘실제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삐딱한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단군은 ‘상상적으로’는 건재한데, 왜냐하면 그의 이름 앞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는 ‘우리’, 혹은 ‘(혈통에 기반한) 단일 민족’으로 호명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민족주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거주하는 개인들이 단군과 맺은 상상적 관계”다.
그뿐일까? ‘소확행’은 “크게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행복’과 맺은 상상적 관계”다. ‘치유의 인문학’은 “항상적으로 치유가 필요한(즉 항상적으로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그럴싸한 달변과 맺은 상상적 관계”다. 헌법은 “한 번도 만인이 법 앞에 평등했던 적이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국가와 맺은 상상적 관계”다. 보험은 “확률상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불행 앞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자본과 맺은 상상적 관계”다. 등등.
진부한 잠언들이 붙어 있는 화장실에 들를 때마다 내가 ‘인문학 입문서’ 앞에 서 있다고 느끼는 이유가 이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