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기에 꾸린 송기숙교수 기념사업회 -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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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5일은 의인 송기숙 교수의 2주기였다. 그보다 사흘 전인 2일(토요일)에 많은 추모객들이 5·18 국립 묘지의 묘소 앞에 모여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가신 지 벌써 두해째가 되었으니 세월은 참으로 빠르기만 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송 교수께서 2021년 12월 5일 세상을 버리시고 해가 바뀐 2022년 봄호 ‘창작과 비평’이라는 계간지에 나는 ‘시대의 걸출한 의인을 보내고’라는 장문의 글을 송기숙 교수 영전에 바친 바 있다. 가누기 어렵던 슬프디 슬픈 추모사였다. 이제 2주기를 맞아 추모식을 올리고 이어서 경향의 많은 추모객들이 모여 의인을 위한 기념사업을 이끌어가려고 기념사업회를 결성하였다. 회고담을 쓰련다.
그때 추모사를 통해 다시 그리운 송 교수에 대한 사모의 정과 슬픔의 정한을 토로하고 싶다. “송 교수는 애초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국문학자였다. 문학에 뛰어나 문학비평가가 되고, 작가로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역사소설이자 민중소설인 대작 ‘암태도’(창비.1981), ‘녹두장군’(1전 12권 창비 1989-1992) 등을 썼다. 또 ‘도깨비 잔치’, ‘재수없는 금의환향’ 등 읽기 편하고 재미가 철철 흐르는 중단편 소설의 작가였다. 학자로서 소설가로서 세상에서 큰 이름을 얻은 기득권자로서 독재시대에도 별다른 불편 없이 살아갈 처지였으나, 양심을 속일 수 없다는 지식인의 사명감 때문에 그 화려하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주투사이자 의인의 길을 걸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라고 송 교수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설명한 내용이다.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는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독재를 주도했던 독재자였다. 무려 18년의 긴긴 세월, 우리 국민은 자유와 인권을 박탈당하고 얼마나 신음하며 모진 세월을 보냈던가. 특히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괴물을 선포하여 국민들은 입과 귀를 닫고 손발이 묶인 모습으로 노예처럼 굴종만 당하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군사독재를 영속화하기 위해 국가주의와 전체주의의 이념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려고 일본의 교육칙어를 모방하여 ‘국민교육헌장’이라는 반인간적 반교육적인 교육을 강요하던 일은 양심적인 인간으로서는 두고만 볼 수 없는 악독한 정치였다.
그러나 광폭한 권력 앞에 어느 누구도 감히 그에 대한 불평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1987년 6월 27일 송기숙교수는 전남대 10명의 동료 교수들과 함께 11명의 교수 이름으로 교육헌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새로운 교육지표를 선포하였다. 이런 내용이 일본의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독재정부는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억지 죄명으로 11명을 해직시키고 송 교수는 엄청난 고문을 받다가 구속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 무섭고 어둡던 공포시대에 교육헌장에 반대하는 교육지표를 선언했으니 이는 캄캄한 밤중에 샛별이 반짝이듯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던 세기의 외침이었으니, 민주회복운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준 위대한 거사였다.
1979년 제헌절에 형 집행 정지로 출소했다. 그로부터 본격적으로 민주투사가 되어 독재 타도에 앞장서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바로 이어지는 5·18 항쟁에는 내란죄에 걸려들어, 또 모진 감옥생활을 해야했다.
특히 5·18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로부터 5·18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서 싸우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참으로 의인의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만인이 인정하는 교수의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민주투쟁에 앞장서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불의 앞에 정의를 주장하고 자기의 희생을 감수할 용기를 지닌 사람을 우리는 분명히 의인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송 교수의 소설이나 작품에는 의인의 정신을 풍부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의 역사관도 그런데서 알아 볼 수 있다. “민중이 자발적인 합의에 이르면 엄청난 힘이 분출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광주항쟁 때도 느낀 사실이지만 나의 민중사관에 대한 낙관론은 바로 이런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녹두장군, 후기)
이제 송 교수의 민중사관을 이어가고 후퇴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기념사업회에 힘을 보태서 큰 역할을 해내기를 간절히 기대해 마지않는다. 언로가 막히고 검찰독재가 진행되는 지금, 송 교수의 뜻이 승리하도록 기념사업에 충실을 기하자.
그러나 광폭한 권력 앞에 어느 누구도 감히 그에 대한 불평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1987년 6월 27일 송기숙교수는 전남대 10명의 동료 교수들과 함께 11명의 교수 이름으로 교육헌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새로운 교육지표를 선포하였다. 이런 내용이 일본의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독재정부는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억지 죄명으로 11명을 해직시키고 송 교수는 엄청난 고문을 받다가 구속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 무섭고 어둡던 공포시대에 교육헌장에 반대하는 교육지표를 선언했으니 이는 캄캄한 밤중에 샛별이 반짝이듯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던 세기의 외침이었으니, 민주회복운동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준 위대한 거사였다.
1979년 제헌절에 형 집행 정지로 출소했다. 그로부터 본격적으로 민주투사가 되어 독재 타도에 앞장서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바로 이어지는 5·18 항쟁에는 내란죄에 걸려들어, 또 모진 감옥생활을 해야했다.
특히 5·18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로부터 5·18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서 싸우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참으로 의인의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만인이 인정하는 교수의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민주투쟁에 앞장서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불의 앞에 정의를 주장하고 자기의 희생을 감수할 용기를 지닌 사람을 우리는 분명히 의인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송 교수의 소설이나 작품에는 의인의 정신을 풍부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의 역사관도 그런데서 알아 볼 수 있다. “민중이 자발적인 합의에 이르면 엄청난 힘이 분출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광주항쟁 때도 느낀 사실이지만 나의 민중사관에 대한 낙관론은 바로 이런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녹두장군, 후기)
이제 송 교수의 민중사관을 이어가고 후퇴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기념사업회에 힘을 보태서 큰 역할을 해내기를 간절히 기대해 마지않는다. 언로가 막히고 검찰독재가 진행되는 지금, 송 교수의 뜻이 승리하도록 기념사업에 충실을 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