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벌레 - 김향남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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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벌레 - 김향남 수필가
2023년 10월 29일(일) 20:00
간밤엔 스르르 잠이 들었다. 별로 뒤척이는 일도 없이 눕자마자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사실 이사 온 첫날 밤이라선지 유독 긴장이 되었다. 잠자리가 뒤숭숭하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이 되었던 것인데, 아침까지 쭉 꿈도 없이 잘 잤다. 수시로 악몽을 꾸던 때와는 달리 모처럼 깊고 편안한 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적이 안도감이 들었다. 꿈 없는 잠이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백지에는 무엇이든 그려볼 수 있듯이.

창문을 열자 새소리가 쏟아졌다. 싱그럽고 활기찬 소리였다. 엊그제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도, 그때도 새들은 청량한 샘물을 퍼 올리듯 맑게 찰랑거렸다. 일순 마음이 환해졌다. 앞에 숲이 우거지고, 새들이 반겨주고…. 더는 바랄 것이 없어 보였다. 매사 심사숙고가 정답은 아닐 터. 내 생전 그렇게 신속한 결정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이사를 했다. 집이 낡아서도 아니고, 더 넓은 평수를 원한 것도 아니고, 새집을 찾는 것도 아니었지만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도 일어났다. 철부지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그만큼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쌓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 집에 영원히 살 일은 없는가 보다. 우리집을 우리보다 더 욕심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제 떠날 때가 됐다는 말이었다. 구태여 미련을 남길 일도 없이 쿨하게 돌아섰다.

세상에 잃기만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도 하는 것이 인생사인 게 분명했다. 삶은 텅 빈 채 가득 찰 수도 있고 폐허에 꽃이 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도 정원을 거느린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밖에서 보기엔 삭막하고 건조해 보일 뿐이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청정한 푸른 숲을 마주하게 되는 곳,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를 따져 보기 전에 먼저 나무를 만나고 새를 만나고, 그리고 숲의 능선을 따라 해가 뜨고 달이 떠오르는 풍경을 상시로 만나게 되는 곳.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걸 미처 몰랐으니, 나는 크게 한방 얻어맞은 것이었다.

다시 밤이 되었다. 짐들은 얼추 자리를 찾았고 어수선한 집안도 말끔해졌다. 숲은 어둠에 잠겨 있고 피곤한 나도 자리에 누웠다. 이미 첫날밤을 치른 후이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납작 누워 있는 틈으로 문득 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내가 눕기를, 아니면 모두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처음엔 소곤거리듯 작은 소리더니 이내 온 천지를 가득 채워 버렸다. 가을밤 벌레 우는 소리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도 않던, 내내 침묵하던 것들의 소리가 저토록 크고 분명한 것이라니! 이게 정말 저 작은 것들의 소리가 맞나? 귀를 쫑긋했다.

벌레들은 더 흥건히 울었다. 서로 무슨 교신이라도 하는 듯, 풀숲 낮은 곳에 은신한 전령들의 타전음이 일사불란 바지런히도 울렸다. 어떤 것은 ‘츠르르르릇 츠르르르릇…’ 하고 울고, 어떤 것은 ‘찌이 찌이…’ 하고 울고, 어떤 것은 ‘수잇 수잇…’ 하고 울었다. 또 어떤 것은 ‘찌르르 찌르르…’ 울고, 어떤 것은 ‘또르르르 똘똘…’ 울고, 어떤 것은 ‘호르르르…’ 하고 울었다. 함께 질러대는 환희의 함성인 듯 혹은 제각기 토해내는 구구한 사연인 듯 큰 소리로 우는 놈,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우는 놈, 숨넘어가듯 자지러지게 우는 놈,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소리를 삼키며 우는 놈, 자랑하듯 우는 놈, 괴로워하며 우는 놈, 원망하듯 우는 놈, 위로하며 달래듯 우는 놈, 유리걸식하듯 우는 놈, 한가하게 우는 놈, 바쁘게 우는 놈, 기뻐서 우는 놈, 슬퍼서 우는 놈…. 울지 않는 놈이 없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던가. 저 울음도 그런 것이 확실했다. 오던 잠이 달아나고 문득 콧날이 시큰했다. 벌레들은 나에게도 울어보라고 말하는 듯 했다. 한바탕 울기 좋은 밤이라고, 크게 한번 울어보라고. 우리 함께 실컷 울어나 보자고 토닥이는 듯도 싶었다. 달래야 하는 울음도 있지만 울어야만 달래지는 울음도 있나니 지금은 울어야 할 때라고 소리쳐 일러주는 것 같았다. 어둠 깊고 소슬한 밤에는 우는 것도 필요한 법이라고….

나는 소리 죽여 젖은 눈을 굴렸다. 저 간곡한 사랑을, 정처 없는 희망을, 쓰린 기억 들을 미아처럼 전전하였다. 그러다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숫제 벌레들의 영토였다. 쏟아지는 충성(蟲聲)에 온 밤이 무르녹고 있었다. 그 밤, 나도 한 마리 우는 벌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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