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관수정, 하심과 겸허의 덕으로 물처럼 살라하네
광주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호남 누정-광주 <12>
광산구 송산동 내동마을에 민초들의 고택·사랑방 같은 누정
조선 선조 때 우의정 오겸 기리며 오응석이 1690년에 지어
팔작지붕 골기와·정면 3칸·측면 2칸…가운데 방 ‘이색적’
기둥엔 풍경 묘사한 글귀…구곡천 물빛, 하늘 아래 가득
2023년 09월 17일(일) 19:20
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내동마을에 있는 관수정은 조선후기 오응석이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나주오씨 오겸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현재의 정자는 지난 1987년 개축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만큼 소중한 게 없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물에서 비롯된다. 그 자체로 생명이면서 또 다른 생명을 포태한다. 누구도 물의 본성으로부터 유리하여 존립할 수 없다.

물과 연관된 친숙한 사자성어 가운데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있다. '선한 것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물의 본성을 집약한 말이다. 본디 물은 미약하고 유하다. 자신을 앞세우거나 이문을 탐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이 마냥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다. 자연의 본성에 반할 때, 인위로 흐름을 돌려 세우려 할 때, 지고한 성정은 반(反)의 기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만들기도 하고, 더러는 폭풍을 만나 거센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늘날 물로 겪는 최악의 참극은 물의 본성을 거스른 데서 연유한다.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하심과 겸허의 덕을 무모하게 훼절시킨 탓이다.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상선약수'의 선한 뜻을 망기한 데 따른 결과다.

그 누정을 찾아가면서, 물의 덕성을 생각했다. 관수정(觀水亭). 말 그대로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은 정자다. 앞서 거론한 노자의 도덕경 8장에 나오는 상선약수와 접맥되는 부분이다.

관수정은 광산구 송산동 내동마을에 있다. 마을 안쪽에 자리해 얼핏 사랑방 느낌도 묻어난다. 그동안 많이 봐왔던 누정의 분위기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옛 것과 현대가 버성기듯 하나의 몸체를 이루고 있다. 고전적인 외형의 정자를 생각한 이들이라면 다소 의아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그러면서 어떠한 장애물도 에둘러 돌아가는 물의 성정을 생각하면 실망보다는 그 침윤된 깊은 뜻에 외려 발걸음을 늦출 것도 같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의 자료, 광주서구문화원 등 문헌에 따르면 관수정은 조선 후기에 광산재(廣山齋) 오응석(1660~1735)이 1690년 지었다고 전해온다. 조선조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나주오씨 오겸(1496~1582)을 기리는 의미로 건립됐으며, 1726년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1840년 안타깝게 훼철이 됐으며 이후 1941년 다시 중건했다. 그리고 1987년 개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망 높은 학자였다. 명종 재위 시절 호조참판을 비롯해 예조판서, 의금부판사 등을 지냈다. 특히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의 학식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관수정을 지은 오응석은 세조 때 명장 양평공 오자치의 6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서육경을 독파했으며, 관수정을 건립하고 후진을 교육하고 지역 유림들과 교유했다.

정자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들어설 수 있다. 마음을 물처럼 다스리고, 물처럼 유한 태도로, 물 같은 검박함으로 누정 안으로 들어선다. 위에서 보면 저편에 천(川)이 보이겠지. 여느 곳과는 다른 관수정만의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묵향에 스민 현대의 시간이라고나 할까, 민초들의 고택 같기도 하고, 옛 사람의 담박한 사유가 깃든 소담한 거처 같기도 하다.

나뭇가지가 앞을 가로막아 멀리 구곡천은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동안 아슴히 저편을 응시하다 보면 물살이 가늠된다. 관수정을 지은 오응석의 마음이 비로소 전해지는 듯하다. 그는 정자의 앞에 흐르는 맑은 내를 보며 ‘관수’(觀水)를 떠올렸을 것이다.

후손인 오왕근은 관수정을 중수하고 다음과 같은 시문을 지었다. 이곳에서 보았을 저편의 물빛이 예사롭지 않다.



남쪽 산 높은 곳에 집을 짓고

몸을 굽혀 굽어보니 시냇물 보이네

계단 위로 풀들이 제각기 키를 높이고

난간 밖의 물빛이 하늘 아래로 가득하여라



관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방을 들였다.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얹은 형태이며 좌우와 전면에 쪽마루를 놓았다. 홑처마에 물받이용 양철판 처마가 긴 탓에 쇠로 된 기둥을 받쳤다. 현판은 김석남의 글이며 김문옥의 ‘관수정기’(觀水亭記)를 통해 중수 과정을 알 수 있다.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기둥에 달린 4개의 주련이다. 대개 세로로 장식 삼아 써 붙인 주련에는 경구가 많다. 그러나 이곳은 풍경의 운치를 묘사한 글이다. 삽상한 흥취와 다감한 정취가 시나브로 묻어난다.



북쪽에는 용진산이 있어 구름이 휘돌아가고

동쪽에는 어등산이 있어 달이 밝구나

서쪽 사랑산으로 저녁놀 비치고

남쪽 복룡산으로는 아지랑이가 피어나네

관수정 아래에 있는 당산나무.
관수정 유허비.


본래 관수정 인근과 강 저편에는 오래된 고목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두 그루 느티나무만 남아 있다. 정월 열나흩날 이곳에서는 당산제를 지낸다. 두 나무는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로, 줄이 감겨 있는 나무가 당산할머니라고 한다. 제를 지내는 날은 줄다리기도 행해진다. 농악대가 흥을 돋우고 사람들은 춤을 추면서 축제의 장을 연출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 남녀가 나누어지는 경우, 여자 쪽이 승리해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을 맨 채 당산으로 가서 제를 모신다.

물론 이런 풍습은 농경사회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지금은 마을 인구가 줄어 줄다리기 자체를 생각하기도 어렵다. 대신 매년 정월이면 당산나무에 줄을 감는 것으로 전통 계승을 가름한다.

아쉬운 점은 누정 관리가 다소 미흡해 보인다는 점이다. 풀이 웃자라 있고 계단 위 철문은 녹슬어 있다. 천혜의 풍광을 거느렸는데 관리가 온전하지 못해 문화자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느낌이다.

관수정을 내려와 구곡천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어떤 이는 평림천이라고도 하는 것 같다. 황룡강과 만나는 지점이라 수풀도 무성하고 수량도 많다. 타박타박 들녘을 걷기에 좋은 날이다.

내동마을과 가까운 인근 송산공원 풍경.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다 심중에 하나의 시가 돌올하게 떠오른다. 고려시대 나옹스님의 선시(禪詩)다.

‘청산은 나를 두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두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