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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주·정세현·임영희, 그리고 우리 - 김미은 여론매체부장·편집부국장
2023년 07월 12일(수) 00:15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를 이끌었던 이금주(1920~2021) 할머니의 평전 발간 소식에 내용이 궁금했다. 지난해 그의 삶을 소재로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소식도 접했던 터였다. 뒤늦게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를 읽다 사진 한 장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지난 2012년, 63년 간 살았던 광주를 떠나며 손녀와 집 앞에서 이삿짐 트럭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평전을 읽기 전까지는 할머니가 광주의 ‘그 집’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나는 단체 현판이 걸려 있던 진월동 양옥집과 2층으로 올라가던 계단이 가장 먼저 생각나곤 했었다.



일제 피해자 인권 지킴이…민중 가수

초보 사회부 기자 시절 할머니를 몇 차례 취재했었다. 책에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부끄럽게도 평소에는 모른 체하다 ‘무슨 날’이나 되야 취재하는 게 기자인지라 내가 유족회 사무실이었던 할머니의 집을 처음 찾은 것은 3·1절이나 8·15를 앞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당시 70대 중반이었던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 모아온 자료와 서류를 바탕으로 기본 지식도 없던 어린 기자의 취재에 성실히 응해 주었다.

일제가 저지른 전쟁으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부모님과 동생들을 보내고, 아들과 며느리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세월 동안 할머니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내 잘못이 있으면 백 번 사죄하되, 잘못이 없을 때는 목에 칼을 들이대도 굴복하지 않는다”고 했던 할머니는 흐트러짐 없이 언제나 강인한 모습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지난 6월은 오래 전 만났던 사람들과 ‘그때’를 되돌아볼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그달 20일 전남대 대강당에서 열린 ‘범능 정세현 10주기 추모 음악회’도 그중 하나였다. 그를 떠올리면 두 모습이 오버랩된다. 대학 신입생 시절, 광주YWCA에서 열렸던 노래패 ‘친구’ 발표회에서 노래하던 정세현(1961~2013)의 모습과 기자가 된 후 범능이라는 이름으로 출가한 그를 인터뷰하러 화순의 한 사찰을 찾았던 기억이다.

친구 이상호 화백의 작품 속 정세현은 맑은 목소리 만큼이나 편안해 보였다. 공연에서는 1980~90년대 민주화 현장에서 정세현이 만든 ‘광주출전가’ ‘꽃아 꽃아’ 등의 노래를 불렀던 동료·선후배들이 그 노래를 ‘다시’ 불렀다. “그토록 사랑했던 음악의 10분지 1만 자기 몸을 사랑했어도, 약자들께 베풀던 그 정성의 1000분지 1만 자신에게 베풀었어도 쓰러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읊은 오랜 벗 고규태 시인의 시도 흘렀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양림동 소녀’로 서울국제노인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임영희(67) 씨와의 만남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취재를 위해 만났지만, 인터뷰는 뒷전인 채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생애사(史)이자, 광주·전남의 시대사이자, 지역의 민주화·문화운동사였다. 수피아 여중·고 재학시절 문학도를 꿈꿨던 그는 사회 운동을 하며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극단 광대 단원으로 활동했고, 80년 오월 광주의 시민군이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작에도 참여했다. 뇌졸중으로 마비된 몸을 극복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 책을 펴냈고, 아들과 영화를 만들었다. ‘양림동 소녀’는 수억 원을 들인 그 어떤 작품보다 가장 감동적인 ‘오월 콘텐츠’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세현 추모 음악회는 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가장 뒷쪽 임시 의자에 앉아 관람했다. 객석을 채운 대다수의 관객은 아마도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거리에서 앞장 서 싸웠던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그들처럼 개인 안위를 살피지 않고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들을 ‘또 다른 기득권 세력’으로 치부하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몇몇 사람의 잘못으로 그들 모두를 매도하지는 않았던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무임승차하지는 않았던가 돌아보게 된다.

옆에서 눈물을 훔치던 한 남성을 보았다. 이날,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보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아들과 만든 영화 ‘양림동 소녀’ 감동

이금주가, 정세현이, 임영희가, 그리고 이름 없는 많은 이들이 있어 역사의 발전은 멈추지 않는다. 양금덕 할머니는 일본에 맞서 여전히 싸우고 있고, ‘판결금’을 거부한 이들을 위한 모금 운동(농협 301-0331-2604-51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마침 ‘양림동 소녀’ 원화와 영화를 만나는 전시회가 광주 동구 갤러리 생각상자(31일까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는 ‘치유의 옷’이라는 이름표를 단 원피스가 걸려 있다. 남편 오정묵 씨가 몸이 불편한 아내를 위해 양재학원에 다니며 만들어준 옷이다. 전시장을 찾아 영화 ‘양림동 소녀’를 꼭 보시라. 힘든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 매번 꿈을 꾸는 그의 이야기 보따리는 치유의 선물이다.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