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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장하지 않는 자 그 누구인가?’- 김미은 문화부장·편집부국장
2022년 10월 26일(수) 01:00
지금 이 글은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를 들으며 쓴다. 너무 아름다워 신까지 잊게 만들지도 모른다며 로마 교황청이 악보 필사를 금지하고, 오직 로마 성시스티나 성당에서만 연주하게 했다는 곡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가 현재, 이 곡을 들을 수 있는 건 한 천재 작곡가 덕분이다. 1774년 아버지와 함께 성당을 방문한 14살 소년은 이 음악을 들은 후 단번에 곡을 외워 버렸고, 곧바로 필사했다고 한다. 그 천재가 바로 모차르트다.



인간의 존엄을 그린 화가, 루오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전(전남도립미술관·2023년 1월 29일까지)에서 만난 ‘미제레레’는 예전에 듣던 그 ‘미제레레’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루오가 구상한 ‘미제레레’ 연작 판화 58점 속에서 만나는 건 ‘나약한 인간’이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드는 전시 공간에 걸린 검은색과 흰색의 판화는 ‘미제레레’를 비롯해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 등 클래식 음악과 어우러져 더 깊은 감동을 줬다.

사람들은 미술 작품 관람은 좀 어렵다고 말한다. 특히 비엔날레처럼 현대 미술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은 더 힘겨워 하는 듯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기에 쉬운 관람 법을 묻는 그들에게 명쾌한 답을 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때마다 하는 말은 이것이다.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마음을 움직인 작품이 단 한 작품만 있어도 그게 참 행복한 경험 아니겠느냐”고.

당신은 혹시 한 작품 앞에서 ‘오래도록’ 서 있어본 경험이 있는 지 모르겠다. 나는 아주 오래 전, 출장이 아닌 개인 여행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 경험을 진하게 했다. 당시 핫했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관람 등으로 일정을 보낸 후 마지막 날 공항으로 떠나기 전 찾은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서다. 이 곳에서 존 에버릿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만났다.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 좀처럼 발길을 떼기 어려웠다. 비행기 출발 시간을 계산하며, 수차례 정문까지 갔다 다시 돌아와 작품 앞에 섰다. 왜 테이트 미술관을 마지막 방문지로 했나 싶어 내 자신을 원망(?)도 했다. 아마도 다시 테이트 미술관을 방문한다 해도 ‘오필리아’ 앞에서 그때처럼 강한 인상을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내 마음 상태, 주변 환경 등 여러 가지가 만들어낸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번 루오전에서는 퐁피두센터와 조르주 루오 재단에서 엄선한 200여 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취재로 여러 번 전시장을 방문했는데, 다른 관람객들처럼 나 역시 ‘미제레레’ 앞에 한참을 머물게 된다. 그중에서도 ‘분장하지 않는 자 그 누구인가?’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세상 살면서 제 얼굴, 제 속마음 다 드러내고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래서 인생의 무대 위에서 다들 분장을 하고 있을 테니 광대 모자를 쓰고 슬픈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에 자신을 대입해 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의 ‘미제레레’ 설명을 쓴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는 인터뷰 후 함께 전시를 둘러봤을 때 “인간의 내면까지도 그린 루오의 이 작품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2016년 형 정양모 신부와 함께 발간한 해설집 ‘미세레레’(기쁜 소식)를 건네받았는데, 표지화가 바로 이 작품이어서 더 반가웠다. ‘미제레레’의 또 한 작품 ‘외톨이들의 거리’와 전시장 초입에서 만난 아주 작은 크기의 초기 풍경화 한 점도 마음에 담아 둔 작품이다.



당신을 사로잡은 작품은

지금 우리 지역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중 근현대 미술을 만나는 ‘사람의 향기, 예술로 남다’전(11월 27일까지)이 진행 중이다. 국립광주박물관 ‘이건희 컬렉션-어느 수집가의 초대’에서는 고미술의 세계에 빠져 볼 수 있다. 담양 아트위크(28일~11월 5일) 행사로 열리는 ‘유유자적-예술이 쉬어가는 도시 담양’ ‘아트슈퍼마켓’에서도 다양한 작가를 만날 수 있다.

올해가 가기 전, 그림이 전하는 말에 잠시 귀 기울여 보자. 그리고, 오래도록 고이 간직할 ‘나만의 작품’을 하나씩 마음에 새기면 좋을 것 같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만난 박수근·이중섭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 나는 강요배의 ‘억새꽃’이 가장 좋았다. 어쩌면 담양 전시에서 마음을 움직일 청년 작가를 만날지도 모른다.

힘들고 외로운 자들, 소외받는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던 루오의 작품에서 느꼈던 감정을 최근 읽은 백수린의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에서 다시 만났다. 힘든 세상이지만, 아직은 살 만하다는 따뜻함이다.

바삐 달려온 삶에서 잠시 멈춰 한 번쯤 주변을 살피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 예술이 건네는 근사한 초대장이다.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