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고구려 금관’을 아시나요-송기동 편집국 부국장·문화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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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고구려 금관’을 아시나요-송기동 편집국 부국장·문화2부장
2021년 11월 24일(수) 03:00
송기동 편집국 부국장·문화2부장
꼭 100년 전인 1921년 9월. 경주 시내 봉황대 서편의 한 고분에서 신라 시대 많은 유물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12년 일제가 신작로를 내며 이미 절반이 헐려 버린 고분이었다. 한 주민이 이곳에서 집벽에 바를 흙을 파다가 우연히 유리구슬을 발견했다. 이를 지나가던 일본인 경찰이 보게 되면서 고분 발굴이 시작됐다. 3·1운동 2년 후인지라 경주 시민들은 일본인이 왕릉을 파헤친다며 분개했다.

발굴은 조선총독부에서 임명한 고적조사사업 촉탁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와 경주보통학교 교장인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주도로 진행됐다. 이들의 발굴은 사흘 만에 졸속으로 이뤄졌지만 발굴된 많은 유물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부장 유물은 금관이었다. 금관총 이후 금령총(1924년)과 서봉총(1926년), 황남리 고분군(1934년), 천마총(1973년), 황남대총 북분(1973년)에서 금관이 잇따라 출토됐다. 1972년에는 경주 교동에서 도굴됐던 금관이 관계당국에 압수되기도 했다.

‘한국 금관 최초 발견 100주년’을 맞아 지난 20일 광주시 광산구 운수동에 자리한 (재)보문복지재단 동곡박물관에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날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1호석실의 관(冠)부장 가능성에 대한 검토’(이건용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와 ‘삼국시대 금관의 상징’(김대환 동곡박물관장) 등 다섯 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딱 한 점밖에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

이번 학술대회장을 일부러 찾은 까닭은 동곡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고구려 금관’에 대한 강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동안 마한 금동관이나 신라시대 금관을 봐 왔지만 ‘고구려 금관’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자 했다.

현존하는 금관은 모두 10점(신라 7, 가야 2, 고구려 1)이다. 개인 소장품인 ‘고구려 금관’은 박물관 1층 별도 공간에 전시돼 있었다. 신라금관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360도 회전대에 올려진 금관은 조명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관테 아래 지름이 19.5㎝, 높이가 15.8㎝ 규모로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관테에 일정 간격으로 부착된 ‘불꽃무늬(火焰文) 세움장식’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관테와 세움장식에는 금실을 꼬아 1원 동전만 한 크기의 액세사리(달개장식)를 무수히 달았다. 금관 앞에는 같이 출토된 금귀고리 등 금동 유물과 함께 일제 강점기 때 ‘고물행상’(古物行商)이라는 직함과 이름(西原用成) 및 주소가 적힌 일본인 거래자 명함이 놓여 있었다. 명함 뒷면에는 유물 출토지로 추정되는 지명(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이 붓글씨로 적혀 있다.

김대환 동곡박물관장은 이날 발표한 연구 논문 ‘삼국시대 금관의 상징’에서 불꽃무늬 상단의 마름모꼴 장식이 고구려 덕흥리 벽화 고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덕흥리 벽화고분의 조성 시기가 서기 408년(광개토왕 18년)이므로 동반 출토 유물과 함께 이 금관의 조성 시기는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비정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또한 “천상계와 현실계를 이어주는 매개자적인 역할은 고대 왕국의 막강한 왕권의 절대 군주만이 할 수 있었고, 바로 그 상징물이 끊이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영원한 태양과도 같은 불꽃을 간직한 고구려의 불꽃무늬 금관이다”라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과거 ‘사슴뿔과 나뭇가지 조합’으로 해석해 왔던 신라금관의 출(出)자형 세움장식에 대해 ‘용의 뿔(龍角)을 형상화한 것’이라며 “신라 금관은 우리 민족의 문화 속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난 문화유산”이라는 새로운 ‘신라 금관 자생설’을 내놓기도 했다.

‘불꽃무늬 장식’ 타오르는 태양 상징

일제강점기인 100년 전 우연히 모습을 드러낸 금관은 ‘타임캡슐’과도 같다. ‘고구려 금관’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아직까지 고구려 금관이 정확하게 어떤 곳에서 발굴됐고 어떤 경로로 일본인 고물행상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의 소장자가 1940년대 후반에 고물행상에게 금관을 입수했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 하지만 중국의 억지스러운 ‘동북공정’을 뒤엎고,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새로운 고구려의 역사·문화를 알려줄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임은 분명하다.

한국 금관이 처음으로 발견된 지 꼭 100년. 1500여 년 묻혀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 금관’의 자태를 이제 두 눈으로 직접 보시라.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인들의 기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이 금관은 우리가 잊어버린 고구려인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전시는 12월 19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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