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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중국집이 변하고 있다
2021년 08월 26일(목) 06:00
광주와 전남에는 오래된 중국집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화상(華商)이라고 붙여 놓고 장사하는 중국집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다. 1883년,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와중에 청나라 군대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때 같이 온 40여 명의 상인이 화교의 시초인데, 그 후 이들 중 얼마나 한국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군대와 함께 상인이 왔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한반도를 중요한 장사의 무대로 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화교는 처음에는 주로 무역과 도소매업에 종사했는데, 점차 음식업에도 진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도 맞았던 모양이다. 원래 이국(異國)의 음식은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는다. 꼭 맛을 떠나서 색다른 언어·인종·문화를 접할 수 있는 작은 세계가 식당이기 때문이다.

중국집이 이 땅에 들어온 지 벌써 140여 년을 헤아린다. 그 세월보다 더 많은 부침이 있었다. 먼저 국적 문제다. 한국에서 식당을 하는 화교는 주로 대륙의 산둥성에서 왔다. 한데 중국 본토에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교가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90년대에 다시 정식 수교하기 전까지 중국은 ‘중공’으로 불리며 대표적인 한국의 적대 국가였다. 한국의 화교는 공산국가가 수립되기 전에 온 사람들이다. 수교가 안 되니, 졸지에 난민이 되었다. 난민이란 말이 좋아 난민이지, 문자 그대로 나라 없는 백성이다.

나중에 중화민국(타이완)으로 흡수되면서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그들로서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가 화교에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한국전쟁 때 통역으로 활약하거나 특수부대 등에 화교가 자원입대하여 맹활약하면서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보여 주었지만 배타적인 분위기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들이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은 90퍼센트 이상 식당이었다. 대도시에 주로 문을 열었지만, 경쟁이 심해지자 점차 읍면 단위로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중국집이 성행하게 되었다. 결혼식을 치르기도 하는 거대한 요릿집도 있었으나, 대개는 이웃의 자그마한 식당이었다. 몇 가지 요리와 면 그리고 밥을 주로 팔았다. 그것이 우리 식생활에서 편입되다시피 한 짜장면·짬뽕·볶음밥·탕수육이다. 우리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화교 중국집의 기록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중국집은 60~70년대에 가장 성행했지만 80년대 들어 점차 기세를 잃었다. 기술을 배운 한국인들이 중국집 시장에 진출하던 시기다. 결정적으로 90년대에 우리나라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화교 사회는 대혼란을 겪는다. 본토 지역 출신인데도 수교가 끊기면서 그동안 타이완과 교류해 왔는데 인민공화국이 다시 한국의 공식 ‘중국’ 파트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의 여파를 여기서 깊게 얘기할 수는 없다. 다만 중국집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화교 후손들이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는 방책이 많아졌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우선 젊은 세대는 한국에 많이 동화되었다. 귀화도 많아졌다. 부산에 한 화교 친구가 있는데, 그는 롯데자이언츠 광팬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부산 시민이다. 화교의 정체성과는 별개로 한국의 시민으로 그들은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교류하면서 일자리가 많이 생겨나기도 했다. 중국과의 무역과 기업의 현지 진출 등에 화교들이 맹활약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3·4세들은 양쪽 나라의 언어가 완벽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 한국인과 연결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화교 중국집은 원래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주방장이 전수되었다. 고급 기술도 비밀리에 전해졌다. 그러나 대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젊은 화교들은 식당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을 생각이 별로 없었다. 힘들고 고단한 주방 대신 앞서 말한 대로 세계와 중화권을 무대로 한국과 함께 일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 오래된 화교 식당에 다시 화교 젊은이들이 돌아오고 있다. 화교 중국집의 가치를 알아보는 시선이 생겼고, SNS 등으로 번져나가면서 ‘일할 맛’이 나고 있다고 한다. 중국집에서 사라졌던 요리도 부활하고 있다. 짜춘결(짜춘권), 멘보샤, 중국식 우동, 기스면 같은 음식이 최근 각광받고 있다. 멘보샤 같은 경우는 아예 인터넷에서 즉석 식품화되어 팔릴 정도다. 탕수육도 배달되는 간편 요리에서 ‘부먹’(소스를 부어 먹기)이냐 ‘찍먹’(찍어 먹기)이냐 논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잘 하는 집들을 찾아가는 애호가들이 생기면서 가치를 되찾고 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필자가 중국집에서 오래 일한 노장 화교들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그들을 만나기 시작한 20여 년 전만 해도 매우 비관적인 말을 들었다. 그들 노장 요리사들은 “이러다가 산둥에서 시작한 한국식 중화요리의 역사가 끊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이제 새로운 중화요릿집의 시대가 열리는 듯하다. 놀랍게도 젊은 화교 요리사와 더불어 젊은 한국의 새로운 소비자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140여 년을 이어 온 옛 중국집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덧붙이자면 광주 전남의 화교 중국집 노포(老鋪: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들도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 지금까지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음식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