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게’는 충장로 역사이자 문화자원
30년 이상 세월 깃든 충장로 가게들
오늘의 충장로를 일군 보석같은 공간들
오래된 가게 동판 붙이고 아카이브사업
21세기 새 콘텐츠 생산…제2도약 준비
오늘의 충장로를 일군 보석같은 공간들
오래된 가게 동판 붙이고 아카이브사업
21세기 새 콘텐츠 생산…제2도약 준비
![]() 전남의료기상사 옛 모습. |
충장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무슨 말일까. 오래된 가게를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거꾸로 간다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닌, 충장로가 함의하고 있는 정서와 가치, 지향점을 이르는 말일 게다.
충장로가 호남상권 1번지라는 것은 바로 호남의 역사를 대변한다는 의미다. 충장로에는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하던 남양통닭, 취업을 하고 양복을 맞췄던 삼영양복점, 외식을 하기 위해 들렀던 신락원,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해 부모님이 구두를 맞춰주던 노틀담 & 바이슨,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맞췄던 거북이 안경 등…
최근 충장로를 지켜온 상인들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발간돼 화제다. 광주 동구청 지원으로, 충장상인회(회장 여근수)가 발행하고 임인자·황지운이 쓴 ‘충장로 오래된 가게’(소년의 서 간)가 그것. 충장로를 지켜온 상인들의 이야기이자, 30년 이상 가게를 이어오고 있는 주인공들의 삶을 담고 있다. 충장로 오래된 가게들은, 광주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봤거나 들었을 법한 가게들이다.
아카이브 사업을 위해 충장로 상인회는 당초 오래된 가게 63곳을 선정했다. 국제복장, 한성일식, 보광당, 아씨주단 등 58개 가게와 지역은행이 포함됐다. 지역은행은 신한은행, 광주은행, 광주충장신협, 민물장어양식수산업협동조합 등이다. 오래된 가게를 선정하는데 상인회 이사(18명)들도 참여했다. 이들은 충장로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이들로 ‘충장로가 살아야 광주가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최근 ‘오래된 가게’ 사업은 동판제작 사업과 맞물려 진행됐다. 2018년 충장로 5가 번영회를 이끌었던 전병원 회장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동구청과 충장상인회에 제안했다.
아울러 ‘오래된 가게’ 편집위원장이라는 직책도 맡아 아카이브를 위한 책자 제작에도 나섰다. 독립출판물서점 ‘소년의 서’를 운영하는 임인자 작가와 황지운 씨가 집필자로 참여했으며 임택 동구청장을 비롯해 여근수 충장상인회 회장, 정미용 동구의회 의장, 홍기월 동구의회 의원 등의 도움을 받았다.
◇곳곳에 박힌 보물같은 공간들
광주에서 태어난 이들은 시내에서 보자고 하면 ‘충장로’를 떠올린다. 시내는 충장로를 뜻하고, 충장로는 곧 광주의 도심을 상징한다. 광주에서 태어났거나 전남이 고향인 이들에게 충장로는 만남과 유희와 추억의 장소다. 미사여구를 제시하지 않아도 ‘충장로를 걸어가며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 때문이다.
1946년 설립된 전남의과기제작소를 비롯해, 1950년대 ‘영안잡화점’으로 시작된 영안반점, 1946년 문을 연 전남의료기상사, 1960년부터 2대째 운영하고 있는 한양모사, 55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시계점 백광당, 1세대 광주 패션계의 증인 도미패션, 이불집으로 55년이 된 이브자리 등은 오늘의 충장로를 일군 공간들이다.
“좋아서 이 일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장벽이 될 수는 없지요.”
도미패션 정옥순 대표는 1965년 도미패션을 열었다. 도미(都美)라는 말은 도시를 아름답게 한다는 매우 시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단순히 일이 좋아 천직이라 생각하고 해왔던 것이지 누군가와 경쟁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말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에게서 배어나오는 자부심으로 읽힌다.
현재 충장로 상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여근수 거북이안경 대표는 곡성이 고향이다. 지난 1976년 광주로 이주했다. 그러다 1982년 충장로에 들어와 지금까지 안경업(거북이안경)을 해오고 있다.
“외국 여행지에 가보면 100년 전통의 오래된 가게들이 많습니다. 충장로 상가에도 2대, 3대째 30년 이상 가게를 이어오고 있는 곳이 적지 않거든요.”
그는 첫마디에 충장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의 가족은 안경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아내와 장남, 차남이 모두 안경사다. 안경렌즈 연마사업은 접었지만 장남에게 렌즈 도매업을 물려줘 가업을 잇고 있다.
노틀담&바이슨 임종찬 대표는 1973년 남양통닭 맞은편에 노틀담제화점을 오픈했다. 곡성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신진제화에서 기술을 배웠다. “쌀한 가마니 주고 3년 동안 기술을 익혔다”는 말에서 기능에 대한 열망과 자부심이 읽힌다.
그렇다면 왜 그는 ‘노틀담’이라는 상호를 내걸었을까. 아마도 눈치 빠른 이들은 이제는 고전이 돼버린 영화‘노틀담의 꼽추’를 떠올릴 것 같다. 노틀담의 꼽추인 콰지모도가 집시인 에스메랄다를 보고 반하는 내용과 사운드 트랙은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 작품이다.
올해로 구두에 입문한지 50년이 됐다. 반백년의 세월을 그는 사람들의 발을 보고 살았다. 그의 아들 충호 씨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구두를 제작하고 있다. 올해 42세인 충호 씨는 어린 시절부터 공장과 가게를 드나들었기 때문에 가죽이나 본드 냄새에 익숙하다. 아버지는 스승이자 선배이고,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다.
전남의료기상사 또한 2대째 운영하는 가게다. 일제강점기 충장로에서 약방을 하던 김상순 대표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지금 자리에 전남의과기제작소를 열었다. 올해 만 70세인 김우평 대표는 부친에 이어 2대째 가업을 운영하고 있다. 1952년 전남계량의과기제작소로 이름을 바꿨고, 직접 주사기를 제작해 국산 주사기의 명성을 떨쳤다. 1966년에는 지금의 전남의료기상사로 다시 이름을 변경했다.
◇광주 상권의 뿌리, 제2의 도약 준비중
이제 충장로는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된 거리가 아닌 21세기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시민의 거리를 상정한다. ‘오래된 가게’ 발간을 계기로 옛것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임택 동구청장은 “충장로는 광주 상권의 뿌리이자 자존심”이라며 “환경의 변화로 예전의 명성이 비록 퇴색한면도 없지 않지만 상인들과 시민들, 오래된 가게가 함께걸어온 이 길은 명징한 광주의 역사”라고 부연한다.
다행히 희망의 싹은 보인다. 오래된 가게 동판도 붙이고 아카이브 사업도 하면서 상인들도 호응을 많이 해준다고 한다. 작은 변화의 계기가 옛 영광을 재현하는 마중물이 될 것도 같다. 한국의 역사에서 충장로가 지니는 무게와 상징성은 여느 도시 거리에 비할 바 아니다. 다시 제2의 르네상스가 활짝 꽃 피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충장로가 호남상권 1번지라는 것은 바로 호남의 역사를 대변한다는 의미다. 충장로에는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하던 남양통닭, 취업을 하고 양복을 맞췄던 삼영양복점, 외식을 하기 위해 들렀던 신락원,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해 부모님이 구두를 맞춰주던 노틀담 & 바이슨,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맞췄던 거북이 안경 등…
최근 ‘오래된 가게’ 사업은 동판제작 사업과 맞물려 진행됐다. 2018년 충장로 5가 번영회를 이끌었던 전병원 회장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동구청과 충장상인회에 제안했다.
아울러 ‘오래된 가게’ 편집위원장이라는 직책도 맡아 아카이브를 위한 책자 제작에도 나섰다. 독립출판물서점 ‘소년의 서’를 운영하는 임인자 작가와 황지운 씨가 집필자로 참여했으며 임택 동구청장을 비롯해 여근수 충장상인회 회장, 정미용 동구의회 의장, 홍기월 동구의회 의원 등의 도움을 받았다.
![]() 도미패션하우스(도미양장점) 40년 전 매장. |
광주에서 태어난 이들은 시내에서 보자고 하면 ‘충장로’를 떠올린다. 시내는 충장로를 뜻하고, 충장로는 곧 광주의 도심을 상징한다. 광주에서 태어났거나 전남이 고향인 이들에게 충장로는 만남과 유희와 추억의 장소다. 미사여구를 제시하지 않아도 ‘충장로를 걸어가며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 때문이다.
1946년 설립된 전남의과기제작소를 비롯해, 1950년대 ‘영안잡화점’으로 시작된 영안반점, 1946년 문을 연 전남의료기상사, 1960년부터 2대째 운영하고 있는 한양모사, 55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시계점 백광당, 1세대 광주 패션계의 증인 도미패션, 이불집으로 55년이 된 이브자리 등은 오늘의 충장로를 일군 공간들이다.
“좋아서 이 일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장벽이 될 수는 없지요.”
도미패션 정옥순 대표는 1965년 도미패션을 열었다. 도미(都美)라는 말은 도시를 아름답게 한다는 매우 시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단순히 일이 좋아 천직이라 생각하고 해왔던 것이지 누군가와 경쟁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말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에게서 배어나오는 자부심으로 읽힌다.
![]() 1968년 당시 광주은행 모습. |
“외국 여행지에 가보면 100년 전통의 오래된 가게들이 많습니다. 충장로 상가에도 2대, 3대째 30년 이상 가게를 이어오고 있는 곳이 적지 않거든요.”
그는 첫마디에 충장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의 가족은 안경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아내와 장남, 차남이 모두 안경사다. 안경렌즈 연마사업은 접었지만 장남에게 렌즈 도매업을 물려줘 가업을 잇고 있다.
노틀담&바이슨 임종찬 대표는 1973년 남양통닭 맞은편에 노틀담제화점을 오픈했다. 곡성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신진제화에서 기술을 배웠다. “쌀한 가마니 주고 3년 동안 기술을 익혔다”는 말에서 기능에 대한 열망과 자부심이 읽힌다.
그렇다면 왜 그는 ‘노틀담’이라는 상호를 내걸었을까. 아마도 눈치 빠른 이들은 이제는 고전이 돼버린 영화‘노틀담의 꼽추’를 떠올릴 것 같다. 노틀담의 꼽추인 콰지모도가 집시인 에스메랄다를 보고 반하는 내용과 사운드 트랙은 오래도록 잔상이 남는 작품이다.
올해로 구두에 입문한지 50년이 됐다. 반백년의 세월을 그는 사람들의 발을 보고 살았다. 그의 아들 충호 씨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구두를 제작하고 있다. 올해 42세인 충호 씨는 어린 시절부터 공장과 가게를 드나들었기 때문에 가죽이나 본드 냄새에 익숙하다. 아버지는 스승이자 선배이고,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다.
전남의료기상사 또한 2대째 운영하는 가게다. 일제강점기 충장로에서 약방을 하던 김상순 대표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지금 자리에 전남의과기제작소를 열었다. 올해 만 70세인 김우평 대표는 부친에 이어 2대째 가업을 운영하고 있다. 1952년 전남계량의과기제작소로 이름을 바꿨고, 직접 주사기를 제작해 국산 주사기의 명성을 떨쳤다. 1966년에는 지금의 전남의료기상사로 다시 이름을 변경했다.
![]() 1989년 당시 조흥은행 앞 거리. |
이제 충장로는 제2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된 거리가 아닌 21세기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시민의 거리를 상정한다. ‘오래된 가게’ 발간을 계기로 옛것의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임택 동구청장은 “충장로는 광주 상권의 뿌리이자 자존심”이라며 “환경의 변화로 예전의 명성이 비록 퇴색한면도 없지 않지만 상인들과 시민들, 오래된 가게가 함께걸어온 이 길은 명징한 광주의 역사”라고 부연한다.
다행히 희망의 싹은 보인다. 오래된 가게 동판도 붙이고 아카이브 사업도 하면서 상인들도 호응을 많이 해준다고 한다. 작은 변화의 계기가 옛 영광을 재현하는 마중물이 될 것도 같다. 한국의 역사에서 충장로가 지니는 무게와 상징성은 여느 도시 거리에 비할 바 아니다. 다시 제2의 르네상스가 활짝 꽃 피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