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마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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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마을들’로
2020년 09월 07일(월) 00:00
[최 유 준 전남대 호남학과 교수]
매클루언의 ‘지구촌’(global village) 개념은 일찍이 라디오·텔레비전과 같은 전자매체의 확장된 소통 기능에 주목하여 국민국가 체제 너머, 그 이후를 상상했다. 전자매체의 국경을 넘나드는 성격에 주목한 이러한 포스트-국민국가 상상은 디지털매체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더욱 부각되어 왔는데, 그 뉘앙스는 사뭇 달라졌다. 전자매체와 디지털매체의 발전이 선형적이기보다는 나선형적으로 국민국가 이전 시대로의 회귀, 말하자면 ‘마을 공동체’의 귀환을 이끈다는 것이다. 문제는 ‘포스트-국민국가 매체론’이라고 포괄적으로 이름 붙여 볼 만한 이러한 논의가 과연 실제 ‘마을’에서 살아가는 ‘지역민’의 삶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 주는가 하는 것이다.

관련된 논의를 담고 있는 ‘국가에서 마을로’라는 책의 저자는 이른바 ‘디지털매체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특히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마을 공간’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가 보는 ‘마을 공간의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갖는 특징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입말 언어문화, ②사람이 곧 미디어, ③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미분화, ④사생활의 부재, ⑤빠른 정보 유통 속도 및 균질한 정보 공유, ⑥직접민주제의 작동, ⑦자생적인 평판 체계. 아닌 게 아니라, ‘입말’을 통해 일상적 체험을 공유하는 소셜미디어와 예기치 않게 사생활의 영역을 침범해 오는 카톡 메시지는 이웃집을 제집 드나들듯 하던 옛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포스트-국민국가 매체론’의 외양을 보이는 이러한 분석과 논의에는 함정이 있다. 이 논의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실상 ‘국민국가 매체론’의 심화 버전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저자의 논점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국가에서 마을로’라는 책의 제목에서 이미 잘 나타나 있다. 그가 ‘마을’을 단수로 보고 있다는 점, 나아가 ‘마을=국가’라는 등식을 처음부터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저자가 설정하는 단수로서의 ‘마을’은 사실상 서울이나 수도권 중심의 대한민국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그러한 의미의 ‘마을’은 종래의 ‘국가’보다 어쩌면 더 강한 구심력을 가진, 저자의 표현대로 ‘사생활이 부재한’, 최악의 경우 파놉티콘의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의는 현실의 일단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디지털매체는 한편으로 빅데이터를 소유한 중심 권력을 키우고 있으며, 국가 단위의 방역 체제가 중시되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맞은 최근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BTS의 글로벌 성공 사례에서 보이듯 매체 환경 변화를 배경으로 국제적 문화 장에서 기존의 굳건했던 중심-주변의 구도가 약화될 만한 조짐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조차도 ‘K’라는 기호가 강조되는 국가주의적 의미로 수용될 뿐이다. 예컨대 광주의 음악계에서 디지털매체를 발판으로 전국적인 성공은 아니더라도 광주 지역 내에서라도 지역민들과 일상화된 음악적 소통을 나누게 된 지역 음악가를 찾기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디지털매체의 영향력과 관련한 포스트-국민국가 매체론은 ‘국가’가 아닌 ‘지역’의 눈으로 비판되고 새롭게 상상될 필요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단수의 ‘마을’(국가)을 어떻게 복수의 ‘마을들’(지역들)로 상상해 볼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있다.

대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대선 불복’이 거론되는 미국의 정치적 혼란 양상이 말해 주듯, 기존의 국가 중심적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디지털매체를 타고 실시간으로 이합집산하는 여론의 속도를 정치적 대표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포퓰리즘으로 재무장하게 될 정치가들이 선택할 길은 파시즘과 전체주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마을’이 아닌 ‘마을들’에 대한 상상은 이에 맞선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이어야 한다. 그것이 복수의 ‘마을들’이어야 하는 이유는 단수로서의 ‘마을’이라는 은유가 국가주의나 전체주의로 회귀하거나 기껏해야 지역 이기주의적 상상으로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상호 존중과 다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복수의 ‘마을들’을 상상할 때에만 국가주의 이후의 지역적 삶의 정치를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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