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풀벌레 소리
![]()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
새벽 예불을 나가려고 방문을 여니, 가을 풀벌레 소리가 온 천지에 가득하다.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두웠으나 귀로 듣는 세상은 풀벌레 소리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가을 풀벌레 소리는 여름이 가장 치성할 때 시작되는 법. 그것은 다만 장마가 끝났다는 신호일 뿐이다. 긴 장마 끝에 듣는 풀벌레 소리라 응당 반가워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마음이 무겁다.
증심사도 이번 장마를 피해갈 수 없었다. 장마가 끝난 다음 날, 증심사 식구들은 수해 복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도 오전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틀 동안 정말 무지막지하게 퍼부은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햇살이 반짝였다.
긴 장마 끝에 찾아온 영롱한 햇살. 그러나 그 순간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가증스럽다’ 였다. 하늘이 정녕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조금이라도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이 병든 지구의 몸부림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중국과 일본의 엄청난 수해 소식을 접하며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지구를 살리는 실천에 나설 때라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당사자가 되자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일상을 꾸려 가던 곳이 뉴스에서나 보던 수해 현장으로 변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왜 하필 우리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하는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코앞에 닥친 일들이 산더미인지라 작심하고 분노할 여유도 없었다. 원망과 분노는 느낄 듯 말 듯 희미하게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왜 나는 잠깐이긴 하지만 마음의 평정을 잃었을까? 왜 나는 하루 아침에 집을 잃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을 보며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들의 불행에 대해 원인과 대책을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닥친 불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란 뜻이다. 같은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나와 남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내 집에 불이 났는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사람은 없다. ‘강 건너 불구경’도 ‘내로남불’과 같은 맥락이다.
중생들은 하나같이 ‘나’라는 색안경을 쓰고 있다. 항상 ‘나’라는 색안경이 보는 대로 세상을 보고 또 본 대로 행동한다. 그렇게 보고 행동하는 세상이 바로 ‘내로남불’이고 ‘강 건너 불구경’이다. 이는 곧 세상에서 ‘나’가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 즉 중생심이다. 중생들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사랑과 미움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 중생심이 없다면 이런 번뇌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평상심이 도’라 하였다. 나무하고 밥하고 불 때는 일들, 먹고 자고 걷고 말하는 일련의 과정들.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이 일련의 흐름을 편의상 ‘나’라고 할 뿐이다. 거기 어디에도 희로애락애오욕은 없다. 이들 모두 중생심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며칠 전, 무심한 아침 햇살을 보며 괜한 원망을 쏟아부은 것도 내 안의 중생심이었다. 중생은 ‘나’라는 허깨비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다.
병든 지구를 살리는 일은 중국과 일본의 수해를 보며 지구를 살릴 대책을 잠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수해를 당했다고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때가 되니 가을 풀벌레 소리가 우리를 반긴다. 지구는 비록 깊이 병들었지만 평소와 다름없다. 패악질만 하는 인간들에게 진저리날 만도 한데 그저 무심하다. 병들어 고통스러워 할 때도, 가을 풀벌레 소리를 선물할 때도, 지구는 평상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구를 보며 중생심에 휘둘리는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 새벽 마음이 무거웠던 건 지구에 대한 미안함과 못난 자신을 참회하는 마음의 무게 때문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마음 다스리기는 더 이상 개인의 행복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 병든 지구를 살릴 수 있다.
긴 장마 끝에 찾아온 영롱한 햇살. 그러나 그 순간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가증스럽다’ 였다. 하늘이 정녕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조금이라도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이 병든 지구의 몸부림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중국과 일본의 엄청난 수해 소식을 접하며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새삼 실감했다. 이제는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지구를 살리는 실천에 나설 때라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당사자가 되자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왜 나는 잠깐이긴 하지만 마음의 평정을 잃었을까? 왜 나는 하루 아침에 집을 잃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을 보며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들의 불행에 대해 원인과 대책을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닥친 불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란 뜻이다. 같은 상황에 대해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나와 남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내 집에 불이 났는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사람은 없다. ‘강 건너 불구경’도 ‘내로남불’과 같은 맥락이다.
중생들은 하나같이 ‘나’라는 색안경을 쓰고 있다. 항상 ‘나’라는 색안경이 보는 대로 세상을 보고 또 본 대로 행동한다. 그렇게 보고 행동하는 세상이 바로 ‘내로남불’이고 ‘강 건너 불구경’이다. 이는 곧 세상에서 ‘나’가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 즉 중생심이다. 중생들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사랑과 미움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 중생심이 없다면 이런 번뇌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평상심이 도’라 하였다. 나무하고 밥하고 불 때는 일들, 먹고 자고 걷고 말하는 일련의 과정들.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이 일련의 흐름을 편의상 ‘나’라고 할 뿐이다. 거기 어디에도 희로애락애오욕은 없다. 이들 모두 중생심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며칠 전, 무심한 아침 햇살을 보며 괜한 원망을 쏟아부은 것도 내 안의 중생심이었다. 중생은 ‘나’라는 허깨비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름없다.
병든 지구를 살리는 일은 중국과 일본의 수해를 보며 지구를 살릴 대책을 잠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수해를 당했다고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때가 되니 가을 풀벌레 소리가 우리를 반긴다. 지구는 비록 깊이 병들었지만 평소와 다름없다. 패악질만 하는 인간들에게 진저리날 만도 한데 그저 무심하다. 병들어 고통스러워 할 때도, 가을 풀벌레 소리를 선물할 때도, 지구는 평상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구를 보며 중생심에 휘둘리는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 새벽 마음이 무거웠던 건 지구에 대한 미안함과 못난 자신을 참회하는 마음의 무게 때문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마음 다스리기는 더 이상 개인의 행복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 병든 지구를 살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