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기와 방사능, 그리고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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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와 방사능, 그리고 올림픽
2019년 12월 18일(수) 04:50
정후식 논설실장·이사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 11회 올림픽에는 49개국에서 4000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참가했다. 근대 올림픽이 개최된 이래 최대 규모였다. 사상 처음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봉송했고, 라디오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으로도 중계됐다.(덕분에 개막식 장면은 지금도 영상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됐던 독일은 어떻게 이처럼 성대하게 올림픽을 치를 수 있었을까.



도쿄, 베를린 판박이 되나



그 배경엔 히틀러의 정치적 야욕이 있었다. 그는 직접 대회 총재를 맡아 독일 민족과 나치(Nazi)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폭력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했다. 10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웅장한 스타디움과 수많은 경기장을 지었다. 반면 유대인 박해의 흔적들은 철저히 지워 버렸다. 개막식에는 나치가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내세우곤 했던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중 ‘환희의 송가’가 동원됐다.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라는 인류애와 평화의 메시지가 6000여 명의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베를린 시내에는 나치의 휘장인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가 오륜기와 함께 나부꼈다. 이를 통해 히틀러는 인종차별과 영토 확장 야심을 은폐하고 자신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선전했다. 위장된 평화였지만, 그 전략에 전 세계가 넘어갔다. 그로부터 불과 3년 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내년 7월 개막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핵심은 욱일기와 방사능이다. 우선 일본은 올림픽에서 욱일기 사용을 허용한다는 방침이다. 외무성이 앞장서 “일본에서 욱일기 디자인은 풍어기나 출산, 명절 등 일상생활 속 다양한 곳에 사용되고 있다”며 전통 문화의 일부라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욱일기가 어떤 깃발인가. 일장기의 태양 문양 주위에 퍼져 나가는 햇살을 형상화한 그것은,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때 사용했던 군기(軍旗) 아니던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전범기로 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패전 후 욱일기 사용이 일시 중단되었지만 1954년 자위대가 창설되면서 저들은 지금도 군기로 사용한다. 해상자위대 깃발은 열여섯 줄, 육상자위대는 여덟 줄의 붉은 햇살이 그려져 있다.

이런 상황은 독일이 전후 반(反)나치법 제정으로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문양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한 것과 대비된다. 동아시아 각국에서는 욱일기 사용에 대해 일본이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긴다. 47개국이 가입한 아시아축구연맹(AFC)도 욱일기가 ‘정치적이고 차별적인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가 하면 일본 정부는 도쿄 올림픽 기간에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인 후쿠시마 원전 부근에서 생산된 쌀 등 식자재를 선수촌에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아가 야구와 소프트볼 등 일부 경기를 후쿠시마 원전 근처에서 개최하겠다고도 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에 100만 톤이 넘게 쌓여 포화 상태에 이른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는 사실이다.

대회가 임박할수록 커져 가는 국제사회의 방사능에 대한 우려에 일본 정부는 ‘언더 컨트롤’(통제 하에 있다)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외 환경단체들은 일본 정부의 방사선량 모니터링 결과와 방사능 통제 능력에 잇따라 의문을 제기한다. 부실한 관리 실태가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일 그린피스는 도교 올림픽 성화 봉송 릴레이 출발지에서 고선량 방사선 지점, 이른바 ‘핫 스폿’(hot spot)이 여러 개 발견됐다고 밝혔다. 수년간 집중적으로 제염 작업이 이뤄진 후쿠시마현 인근 J빌리지에서 원전 사고 이전보다 1775배나 많은 방사선이 측정됐다는 것이다.



욱일기와 방사능, 그리고 올림픽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도쿄 올림픽이 베를린 올림픽의 데자뷔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베 정부는 올림픽을 ‘후쿠시마 부흥’과 ‘새로운 일본’을 과시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 선전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밖으로는 핵발전소 사고를 잘 수습한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라는 이미지를 심고, 안으로는 국민의 단합을 이끌어 내 장기 집권을 이어 가려는 포석이다. 우경화를 무기로 일본 최장수 총리 기록을 이미 경신한 아베는 그동안 평화 헌법 개정을 ‘필생 과업’이라고 말해 왔다. 자국 보호를 위한 무장을 넘어 타국을 공격할 수 있는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바꿔 군사 대국화하려는 야심이다.

도쿄 올림픽 또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일본 정부의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인다. 스포츠를 통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려는 올림픽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국화와 칼’의 이중성 속에서 평화보다 전쟁을 지향하는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니 일부에서 올림픽 보이콧 얘기까지 나오는 것이다. 일본은 침략의 역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커녕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거나 세탁하여 국제 사회의 공분을 사 왔다. 강제 징용 배상 판결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불만에서 촉발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가 대표적 사례다.

작가 박경리는 ‘일본산고’에서 “일본을 이웃으로 둔 것은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 일본이 이웃에 해를 끼치는 한 우리는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 그렇다. 일본이 주변국들에게 위해적 존재로 행동하는 한 공동 번영은 허상에 불과하다.

올림픽 경기장에 욱일기가 휘날린다면 일본의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를 당한 국가들은 또다시 과거의 상처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2차 가해나 다름없는 행위다. 지금이라도 일본 정부는 욱일기 허용을 철회해야 한다. 또한 각국 올림픽 대표 팀에 방사능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고, 선수들이 이에 노출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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