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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편제’와 임권택
현장에서만 60년,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역사
막노동꾼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
‘취화선’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2019년 11월 20일(수) 04:50
임권택은 1992년 당시 ‘태백산맥’을 매만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정권은 아직 이념의 문제를 다룰 시기가 아니라며 제작을 불허했다. 이에 임권택은 70년대 후반에 영화화하려다가 여러 여건상 제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사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 연작에서 ‘서편제’와 ‘소리의 빛’을 각색해 영화로 만들었다.

서편제


그리고 1993년 4월 10일, ‘서편제’가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상한대로 출발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1주가 지나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의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청와대 시사회가 기폭제가 되어 각계 유명 인사들의 관람으로 이어졌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서편제’를 보고나서 이야기를 쏟아냈고, 다방면에서 뉴스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렇게 ‘서편제’는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두며 임권택을 ‘국민감독’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임권택은 1934년 11월 2일 전남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에서 칠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원초등학교를 다니던 3학년 때 해방(1945)을 맞았다. 이 말은 임권택이 일제강점기 때 학교를 다녔다는 말이며, 그가 창씨개명해서 얻은 이름은 하야시(林)였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기간 동안 임권택의 집안은 좌익이었다. 일본에서 좌익사상을 배워온 삼촌의 영향이 컸다. 이승만 정권에서 좌에 선다는 것은 빨갱이가족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좌익이었던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리고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집안의 공기를 견디지 못한 임권택은 가출해서 부산행 열차를 탔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만난 군화장사꾼들은 전쟁이 끝나자 남은 군화를 그에게 맡기고 서울로 떠났다. 얼마 뒤 임권택은 군화장사를 접고 서울에 도착해 영화판에 뛰어든 사람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임권택은 영화현장에 발을 들여 놓았다.

1955년, 임권택은 정창화 감독의 ‘장화홍련전’이 3분의 1쯤 촬영된 시점에서 영화 스탭으로 참여했다. 그가 했던 일들은 식사를 나르고, 사탕이나 커피, 담배, 촬영자재, 대소도구를 운반하는 일 등 그야말로 잡일이었다. 이때 가장 힘든 일은 4~50㎏의 배터리를 짊어지고 산골짜기 로케현장까지 운반하는 일이었다. 이후 임권택은 1961년까지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나가며 정창화감독 아래에서 영화현장을 익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권택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 말 그대로 영화현장에 있으면 밥은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권택은 정창화 감독과 다툰 것이 계기가 되어 감독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미 영화현장에서 일 잘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기에 영화연출의뢰가 들어온 것은 당연했다. 임권택은 고민했다. 왜냐하면 데뷔작이 흥행에 실패하면 영화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임권택은 데뷔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를 연출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잡초’(1973)를 찍을 때까지 10년 동안 무려 51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에게 영화는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는 액션영화, 멜로영화, 공포영화, 시대극 그리고 코미디와 스포츠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제작자가 원하는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중반에는 국가가 요구하는 반공영화와 새마을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런 그가 ‘잡초’부터 영화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영화연출을 시작했다. ‘잡초’ 이전까지는 할리우드영화의 아류작들을 양산해 냈다고 자책했다. 임권택은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고심하며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담아낸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쉽지만은 않았다. 10년 동안의 영화 만들기가 체질화되어 있었고, 저속한 취향 등의 습성을 떨쳐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임권택은 “없는 얘기 꾸며 찍지 말고, 진짜 사람 사는 얘기를 찍자”, “한국인이 아니면 못 만드는 영화를 만들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임권택은 ‘왕십리’(1976), ‘족보’(1978), ‘깃발 없는 기수’(1979), ‘짝코’(1980)등 한국감독이 아니라면 관심두지 않을 영화들을 만들면서 80년대로 건너온다.

그리고 ‘만다라’(1981)를 내놓게 된다. ‘만다라’는 계율과 계율 밖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도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이때부터 임권택의 스타일상의 특징인 롱테이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안개마을’(1982)은 14일 만에 완성한 영화로 유명하다. 찍고 완성까지 14일이 걸렸다. 흥미로운 것은 짧은 시간에 찍었지만 완성도가 높았다는 점이다. 임권택의 영화장인으로서의 숙련된 솜씨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길소뜸’(1985)은 이산가족 상봉을 소재로 했다. 한국전쟁으로 떨어져 살던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임권택은 달리 생각했다. 반드시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성찰한 결과가 ‘길소뜸’이다.

‘씨받이’(1986)는 “남아선호사상에 대해서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며 만든 영화였다. 영화 중간의 출산 장면은 부인 채령이 실제로 출산하는 장면을 임권택이 보면서 느낀 것을 영화로 옮겼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강수연은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아다다’(1987)와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역시 해외 영화제에 진출해 수상하는 등 1980년대 임권택영화들은 한국적인 소재를 한국적인 형식에 담아내며 세계인들과 만났다.

장군의 아들


‘장군의 아들’(1990)은 68만 7000명을 동원해 ‘겨울 여자’ 이후 13년 만에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다. 70년대 유행했던 액션무협영화들과는 결이 다른 임권택표 액션영화의 출현이었다. 그리고 임권택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다는 지론을 실천하듯 ‘장군의 아들 2, 3’편을 연출했다. 이어서 내놓은 ‘서편제’(1993)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서편제’의 성취 중 하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칸영화제가 임권택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후 ‘춘향뎐’(1999)이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드디어 ‘취화선’(2002)으로 감독상을 들어 올리며 명실공히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일별해 보았듯이, 임권택은 좌익집안에서 아동청소년기를 보내다가 숨 막힐 듯한 집안의 공기를 참지 못하고 가출했다. 그리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영화현장에 뛰어들어 영화를 배웠고,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영화를 찍다가 거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니까 임권택은 부침이 많았던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한국영화현장에서 60년 이상 살아남았다. 그런 점에서 임권택은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