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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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
[데스크시각-김미은 문화부장]
2018년 05월 29일(화) 19:39
작가 박지현 씨는 2년여 전 광주 산수동 골목길에 살고 있는 어른들을 자주 찾아뵈었다. 박 작가가 동네 노인들에게 커피를 ‘쏠’ 때마다 허리가 90도로 굽은 슈퍼마켓 주인 할머니는, 가게에서 파는 300원짜리 커피를 한 가족 같은 옆집 할머니들에게 배달하곤 했다. 그리곤 함께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론 삼겹살 파티도 열었다.

동네 사람들과 인연을 맺기 전, 박 작가는 우연히 좁디좁은 산수동 골목길을 찾았었다. 경사진 길을 따라 노을이 지는 모습이 너무 예뻐 한참을 서 있었다. 꼭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 오래된 풍경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골목집들이 모두 사라질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재개발이 확정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박 작가는 임창진 사진작가와 함께 6개월간 거의 매일 골목길을 찾았다. 영상을 촬영하는 지인도 합류했다. “오랜된 삶의 풍경들이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까웠고, 기록으로 남겨 두자”는 마음이었다. 주민들의 생생한 사연, 집이 허물어지는 모습, 이사 가는 날 풍경 등이 사진과 영상과 글로 남았다. 부유한 삶은 아니지만, 끈끈한 정으로 엮인 그들의 삶은 따뜻했다. ‘골목 사람들’은 동네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그 덕분에 맞벌이 부부들은 맘 편히 일을 할 수 있었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슈퍼 할머니의 남편을 함께 보살핀 것도 바로 골목 사람들이었다.

박 작가는 이 과정에서 할머니가 수없이 기운 속바지를 비롯해 앨범.그릇 등 동네 사람들이 이사 가며 버려두고 간 물건들을 하나둘 모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산수동 골목길 사람들의 삶’을 보여 줄 수 있는 전시를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광주에 오래된 공간 많았으면



충장로 5가에 자리한 옛 조흥은행(신한은행) 건물은 충장로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었다. 최근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이들은 깜짝 놀랐을지 모른다. 조흥은행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박선홍 선생의 ‘광주 100년’에 따르면 조흥은행 건물은 1943년 현재의 자리에 처음 문을 열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현재 사옥은 지난 1962년 신축된 건물로 목재 대신 유리와 벽돌, 철제 구조 등을 활용한 광주의 대표적 근대식 건물이다. 한때 광주시와 동구청 등이 매입을 타진하기도 했지만 결국 한 건설업체에 매각됐고 지난 3월 건물이 헐리면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대신 이곳에는 고층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며칠 전 광주·전남 건축가회 주최로 영화 ‘콜럼버스’ 상영회와 세미나가 광주극장에서 열렸다. 치유의 건축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배경이 된 미국 인디애나주 콜럼버스는 인구 4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지만 ‘세계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로 불리는 곳이다. 건축과 주민의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업가, 건축가, 행정가,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낸 결과였다.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하필 영화가 상영된 곳이 조흥은행에서 50m 떨어진 광주극장이다 보니 왠지 ‘우리의 민낯’을 보는 듯해 씁쓸해졌다. 광주극장에도 건물 매각을 문의하는 전화가 자주 온다는 말에 한숨이 더해졌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박홍근 회장은 안타까운 마음이 더했다. 오래전부터 이 건물의 운명에 관심을 가져 온 그는 결국 자치단체에서 매입이 어렵다면, 건물의 역사만이라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뜻이 맞는 이들과 건물을 기억하고, 아카이빙하는 작업을 진행해야지 싶었는데 잠시 미루는 사이, 건물은 순식간에 헐리고 말았다. 그는 지금부터라도 광주의 미래 유산이 될 광주 근대 건축물에 대해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흔적 없이 사라진 옛 조흥은행



도시 재생 사업이 화두가 된 지 오래다. 문재인 정부 역시 도시 재생 뉴딜 사업에 5년간 50조 원을 투입, 2022년까지 지역특화 재생 100곳 등 총 250곳의 지역 혁신 거점을 조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도시에 새로운 가치를 불어넣는 데는 항상 보존과 개발 논리가 부딪친다. 도시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건물이나 공간, 그리고 오래된 가게들은 보존하고 미래 자산으로 만들어가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우선적으로 그 역사와 흔적만이라도 기록하는 작업이 꼭 이뤄져야 한다. 어떤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면 언젠가는 예전의 광주를 ‘상상’해 보는 것조차 어려워질지 모른다. 2주 후면 새로운 자지단체장이 선출되는데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동명동을 지날 때면 꼭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가게가 있다. 1965년 문을 연, 81세의 신영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시계 수리점 ‘용문당’이다. 며칠 전 여전히 안경을 끼고 시계 수리에 열중인 할아버지를 유리창 밖에서 바라보노라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드는 것이었다. 광주에 이런 오래된 공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mekim@kwangju.co.kr
mekim@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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