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말바우시장 연가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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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말바우시장 연가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3년 11월 05일(일) 22:30
호박잎 2000원, 단감 3000원.

할머니의 은빛 머리카락이 가을 햇살에 은실은실 나부낀다. 할머니가 깔고 앉은 작은 종이가 빼꼼하게 얼굴을 내민다.

고향이 그립거나 문득 누군가 보고 싶으면 광주 말바우시장으로 간다. 거기, 햇빛 조각 같은 옛것들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할머니 손을 꼭 잡고 가던 곳, 맛난 멸치국수가 있고, 이웃집 아저씨가 사주신 국밥이 있고, 달콤한 호떡이 있는 곳이다. 닭이나 돼지, 오리나 강아지도 아닌 말(馬), 무등산 천왕봉·지왕봉·인왕봉을 휘돌아 단박에 이곳에 날아왔다는 장군의 전설이 서린 말바우시장은 이름부터 힘차고 상서롭다.

말바우에 들어선다. 전집, 국밥집, 젓갈집, 홍어집, 철물점, 방앗간, 수선집….

반은 먹거리, 반은 생활용품이다. 또 절반은 가게고 나머지 절반은 고샅, 반은 상품이고 반은 사람이다. 그 긴 행렬에 몸을 싣는다.

시장의 매력은 단연 상처에 있다. 사과나 배, 고구마 모두 말짱하다. 허나 조금만 살펴보면 사부자기 흉터 하나쯤 있다. 갈치나 고등어도 이리저리 뒹굴다가 비늘이 벗겨지거나 꽁지가 떨어져 나갔고, 고구마나 감자도 어디 몸 한쪽 벌레에게 준 녀석들이다. 백화점에서 밀려 공사판이나 새벽 인력시장에 모인 이들처럼, 몸에 상처가 있어서 진짜 생을 사는 생들. 어디 상처 없고 흠결 없는 생이 진짜 삶이더냐고 말바우는 묻는 것 같다.

녀석은 또 맨몸 맨살이다. 한겨울에도 옷 입는 법이 없다. 빨갛게 익은 영암 대봉도 무안 바다에서 다리 하나 잘린 낙지도 그냥 대야에 수줍게 맨몸으로 있다. 그러다가 주인 만나면 봉지에 담겨 간다. 저 백화점의 것들처럼 화려한 금관을 두르지도 않고, 튼튼한 상자로 포장하지 않는다. 값비싼 나주 배도 여기선 꾸미는 법 없는 날것이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알몸,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우리 인생을 무척 닮았다.

말바우는 자존심 따윈 필요 없는 곳이다. 굳이 자기를 때깔 좋고 싱싱해서 비싸다고 하지 않는다. 좀 으스대다가도 손님이 그냥 갈라치면 금방 제 몸을 낮춘다. 행여 비싸게 팔았다 싶으면 얼른 덤이 몇 개 더 올라간다. 덕담도 떨이도 또 올라가서, 받은 이도 주는 이도 즐거운 곳이다.

글자 ‘말’처럼 면허시험장(ㅁ)이 있고, 주변 상권이 이리저리(ㅏ) 구불구불(ㄹ) 이어진 고샅 사이로 비록 상처 입었지만 가공도 포장도 없는 곳, 즐거운 흥정이 있고 덤이 있는 곳, 말바우다.

스피커 소리나 격식 대신에 구성진 목소리와 요란한 남도 사투리가 오가고, 누님이 있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있는 곳, 말바우라지만 없는 바위를 떠받치듯, 보이지 않는 정을 주고받는 시장이다.

이들은 담양과 곡성, 장성에서 온다. 해남, 무안에서도 온다. 호박이나 단감은 그 지역 흙에서 뿌리를 박고, 그곳 물로 크고, 그곳 햇빛과 공기로 자란다. 그곳 바다에서 건진다. 그러니 고향 남도의 것들이 통째 오는 곳이다.

2, 4, 7, 9, 서 있는 짝수 둘과 걷는 홀수 둘, 날들이 말 발자국처럼 찍힌 날에는 말바우시장으로 간다. 필요한 물건도 살 무엇도 없지만 우산동으로 간다. 그곳 고샅에 들어서면 나는 조금씩 충전이 된다. 거기 오가는 이들에게 마음껏 옷깃을 스친다. 바구니보다 사람들 마음과 사람의 정으로 나를 채운다. 생의 활력을 꽉 채운다.

거긴 고향의 논밭이 있고, 바다가 출렁이고, 막걸리 한잔 걸친 아버지가 있고, 생선을 이고 가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있고, 호박잎 2000원, 단감 3000원. 매직으로 쓴 옛것을 앞에 두고 가을 햇살에 졸고 계신 할머니가 있다.

마음이 허전하면 언제나 그곳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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