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염치의 회복, 외면할 수 없는 요청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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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옥숙 인문지행 대표] 염치의 회복, 외면할 수 없는 요청에 대하여
2023년 03월 06일(월) 06:00
어떤 표현은 본래 의미하는 바는 사라지고 빈 기표가 되는 일이 허다하다. 말이 본래의 무게를 잃은 시대일수록 더 그렇다. 그중 하나가 ‘사람이라면 염치가 있어야지’하는 것이다. 사실 이 말에는 건성으로 들을 수 없는 함축성이 있다. 염치는 사람이 자기 잘못과 실수를 돌아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염치가 없다는 표현은 사람의 자격과 조건에 관한 매운 질타이다. 요즘의 세태를 한마디로 하자면 가히 ‘몰염치의 세상’이다. 물론 염치의 상실은 생존 경쟁이라는 바닥 없는 수렁에서 허덕이는 현대인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염치의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늘 궤를 함께해 왔다. 이런 염치의 중요성을 조선 후기의 선비 삼연 김창흡(1653~1722)은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시구절로 말한다.

삼연은 “오늘날 보건대 염치는 삽사리 배 속에나 있네. 늘 제 밥그릇이나 긁을 뿐 부엌을 향해서는 앉지도 않네”라는 시를 썼다. 사람의 조건인 염치가 오히려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고, 강아지 배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짧은 시구절을 읽는 일은 순식간이지만 민망함과 부끄러움의 시간은 한참이나 길다. 삽사리의 배 속에도 있는 염치를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세상이라니. 강아지는 자신의 밥그릇에 대한 불만도, 분수에 넘치는 탐욕도 없다. 그래서 밥이 있는 부엌을 향해서 짖어대기는커녕 그쪽을 향해서 앉지도 않는다. 염치의 힘은 늘 밥그릇에 대한 탐욕에서 더 적나라하고 독하게 노골적으로 무너진다. 하지만 시 속의 강아지는 자신에게 합당한 몫에 만족함으로써 염치를 안다. 삼연이 하고 싶은 말은 부당한 몫을 끝없이 더 얻고 싶어서 부엌을 향해서 짖어대는 일은 강아지만도 못함을 알라고 하는 뜻이다.

고대의 철학자들도 염치를 탁월한 덕으로 여기며 자주 철학적 대화의 주제로 다뤘다. 대표적인 책이 플라톤이 쓴 ‘프로타고라스’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 제자인 플라톤이 스승과 프로타고라스의 대화를 책으로 기록한 것이다. 프로타고라스(BC 485?~BC 414?)는 당시의 가장 유명한 소피스트로 소크라테스와 염치라는 덕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 논쟁적 대화를 펼친다. 프로타코라스에 의하면 염치는 신으로부터 인간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선물이자 능력이다. 사람은 염치를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견해에 대한 두려움과 존중 그리고 그러한 견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의미다. 염치가 없는 상태는 곧 오만함이고, 이 오만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가장 불행한 일이며, 그 결과로 오는 파국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고 배우며 가르쳤다.

염치는 왜 중요한 문제인가? 삶의 공간이 자연 상태에서 공동체 안으로 옮겨오면서 상호적 작용과 결속, 유지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몇몇 소수 영웅의 영광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고, 개인 모두의 삶을 위한 기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염치는 고대의 철학적 대화에서 끝나지 않는 의미를 가지며, 오히려 오늘날의 개인 모두에게 필요한 조건이다. 더 많은 사회적 염치야말로 바로 지금의 시대적 요청이 아닌가. 프로타고라스가 강변하는 염치의 가치를 좀 더 살펴보자.

사람들은 세분화된 다양한 전문적 기술을 각자 원하는 대로 배워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함께 사는 삶에 필요한 시민적 기술(염치)은 개인의 것이 아닌 이유에서 신 중의 신인 제우스가 직접 나선다. 제우스는 ‘모두에게 분배해서 모두가 나누어 갖게 하시오. 다른 기술들처럼 소수만이 가지면 안 되오’라고 말한다. 모두가 갖지 못하면 공동체를 이룰 수 없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염치와 정의를 누구나 알지 못한다면 병처럼 공동체의 건강을 위협한다고 경고한다. 여기서 공동체의 조건은 국가적 문제나 충돌하는 이해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좁은 골목길을 막고 버티며 대치하는 운전자에서부터 차 한잔을 나누는 일상의 자리에서까지 염치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염치를 아는 것이 사람됨의 출발이자 길이기 때문이다. 이제 염치가 숨 쉬는 현장을 강아지에게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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