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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증인’ 이광영씨 유품, 5·18기록관에 전시
청문회 증인 등 5·18 상징 인물
계엄군 총탄 맞아 한평생 후유증
유족, 총탄 혈흔 옷·파일 등 기증
전두환 사망한 날 숨진 채 발견
2022년 04월 13일(수) 20:35
5·18 당시 계엄군이 이씨를 향해 쏜 총탄에 의해 구멍(흰색 선 안)이 뚫린 재킷.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와 2019년 광주지법의 ‘전두환 회고록’ 사자명예훼손 재판 등 5·18의 진실이 드러났던 고비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던 고(故) 이광영씨(사망 당시 68세).

계엄군 총탄을 맞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평생 ‘1980년 5월 광주의 증인’으로 살았던 그의 유품과 5·18 관련 자료들이 광주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된다. 유품 중에는 부상자를 구하다가 계엄군 총탄을 맞았던 흔적이 또렷한 당시 외투, 광주기독병원이 발급한 빛바랜 ‘척추손상 진단서’가 포함돼 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 기증된 고(故) 이광영씨(결혼식에서 사회를 보던 생전 모습) .
13일 광주5·18기록관과 이씨 유족에 따르면 지난 12일 동생 광성씨가 이광영씨의 유품과 그가 평생 모아온 5·18 관련 자료를 5·18기록관에 기증했다. 구멍 뚫린 밝은 갈색 계열의 재킷, 문서·사진 등이 들어있는 파일 6권을 비롯해 사과 상자 한 상자 분량이다.

유족은 혈흔이 묻은 재킷을 한차례 세탁한 게 두고두고 아쉽다고 말했지만, 재킷 하단 허리 부분에는 총탄이 지나간 구멍이 또렷하다. 자료 중에는 5·18 직후 진상규명을 위해 피해자를 규합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며 작성했던 문서 자료도 포함돼 있다고 유족은 전했다. 유족은 “고인께서는 생전에 모아둔 자료를 소중히 관리해왔다. 5·18 관련 자료가 기록관에 소장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셔서 기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광영씨가 평생을 모아온 자료·사진·문서.
5·18기록관 측은 이광영씨의 자료를 일단 수장고로 옮긴 뒤 전시와 연구를 위한 분류작업을 준비 중이다.

고인은 1980년 5월 당시 승려 신분으로 석가탄신일 준비를 위해 광주를 찾았다. 5월 19일 대검을 장착한 총기를 메고 한 손에는 특별히 제작된 곤봉을 든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일을 도왔다. 남구 월산동을 지나다 계엄군 헬리콥터에서 쏜 총탄을 맞고 쓰러진 학생을 옮기기도 했다. 시민들을 돕던 당시 스물일곱의 그는 허리춤에 총탄을 맞았고 그 뒤로는 다시 걸을 수 없게 됐다. 이때 1급 장애인이 된 그는 여생을 휠체어에 의지해 살면서 트라우마에도 시달렸다.

악조건에서도 광영씨는 5·18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목소리를 높였다. 1982년 5·18부상자회 창립에 앞장서 초대 총무를 맡았다. 1985년에는 경찰이 망월묘역 참배를 막자 다른 부상자들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선두에서 경찰 제지선을 뚫었다.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에선 증인으로 나가 헬기 기총소사를 비롯한 전두환 계엄군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다. 30여 년 뒤인 2019년 전두환씨 사자명예훼손 재판에서도 거듭 헬기사격을 증언했다.

광주기독병원이 발급한 진단서.
고인은 5·18 원흉인 전두환이 사망한 지난해 11월 23일 강진군 군동면 고향 마을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집을 나서기 전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유서는 생전 그의 고통을 짐작게 한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에게’라는 제목의 A4 한 장 짜리 유서에는 ‘최근 허리 통증이 심해져서 힘들고 괴롭다. 5·18에 대한 원한, 서운함을 모두 잊겠다. 가족에게 고맙다’고 적혀 있었다. 동생 광성씨는 “평생 부상 고통 속에 살아온 형님은 발포명령자도 나오지 않고, 책임자도 밝혀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날의 진실이 역사 속에 묻히고 있는 상황을 원통해 했다”면서 “형님의 유품 기증을 계기로 진실 규명이 속도를 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사진=독자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