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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한국 독립사’ 재간행 누가 방해하는가
2021년 08월 19일(목) 05:00
필자가 대학원에서 독립운동사를 공부할 때 의아했던 것은 대부분의 자료가 일제 관헌 자료라는 점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왜경(倭警)이라고 불렀던 일제 경찰 등의 자료는 독립운동의 실상을 알기에 대단히 부적절했다. 왜경은 고문을 해서라도 많은 정보를 획득하려 한 반면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고문을 참아 가며 정보를 보호하고 축소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가 기초자료가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병도·신석호 같은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泰斗)가 되어 현대사 연구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현대사는 역사학자들이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이런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게 현대사는 곧 독립운동사였던 것이 실제 이유였다.

1980년대 후반경에야 일부 역사학자들이 현대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그 사이 생존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생존 독립운동가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기회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었다. 그 후 희산 김승학 선생 등 생존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쓴 ‘한국독립사’라는 역작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김승학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과 참의부 참의장 등을 역임했는데, 1960년 초 심산 김창숙 선생, 임정 의정원 의장 출신의 오산 이강 선생과 함께 생존 독립운동의 3거두로 불렸다. 희산 김승학은 상해 시절 백암 박은식 선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쓸 때 자료 수집 등을 도왔다. 백암과 희산은 이때 “다음에는 나라를 되찾은 웃음의 역사인 ‘한국독립사’를 편찬하자고 굳은 맹약을 했다. 한데 백암이 먼저 세상을 뜨자 희산은 이 맹약을 지키기 위해 한손에는 총을 들고 영토전쟁에 나서는 한편 다른 손에는 붓을 들고 역사전쟁에 나섰다.

희산은 1929년 11월 만주에서 체포되어 1935년 4월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할 때까지 5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내가 불행히 왜경에게 체포된 후 팔다리가 부러지는 수십 차례 악형을 당한 것이 주로 이 사료수색 때문’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일제는 희산이 모은 독립운동 사료 색출에 사활을 걸었다. 광복 후 희산은 광복군 3지대장이었던 백파 김학규 장군과 정의부 중대장으로 19년간 최장기 투옥수였던 장공 정이형 선생 등 생존 독립운동가들과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한국독립사’ 집필에 나섰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때는 희산이 일시 구속되는 등 탄압을 받아 간행하지 못하고, 1965년에야 겨우 간행할 수 있었다. 희산은 출간 전인 1964년 세상을 떠나면서 서문만 남겼는데 “붓이 여기에 이르매 백암 동지의 추억이 새로워 눈물이 지면을 적신다”라고 회고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피눈물로 쓴 ‘한국독립사’는 내용이 방대하고, 대부분 한자(漢字)여서 일반 국민들이 접하기 어려웠다. 또한 희산이 피로 지킨 사료들과 생존 독립운동가들의 육필 이력서 등 수많은 자료도 정리해야 했다. 그래서 2015년 광복 70주년과 ‘한국독립사’ 출간 50주년을 맞이해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던 희산의 독립운동사 사료들을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이배용 원장과 5년간 재간행 사업에 합의했다. 그러나 1년 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안병욱 교수가 한중연 원장이 되자마자 이 사업이 강제로 중단됐다.

엊그제 봉오동 승첩의 주역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되었다. 한때 방송에도 나왔던 ‘봉오동전투도’는 이 전투에 실제 참여했던 철마(鐵馬) 박승길(朴升吉) 선생이 작정한 지도로서 희산 사료 중의 하나였다. 필자는 이병도·신석호의 제자들이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한 채,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보수의 가면을 쓰고, 진보정권이 들어서면 진보의 가면을 쓰며 식민사학을 수호해 왔다고 비판했다.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항일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담이 들어맞아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전형적인 분야가 역사학계와 그 카르텔이다. 그러나 ‘한국독립사’ 재간행 사업은 언젠가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이 나라를 다시 세운 독립운동의 가치는 이 민족이 생존하는 한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