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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터 가까이 꽃과 나무, 정원을 이루다
‘화가의 정원’, 랜드마크가 되다 (상)
2020년 09월 22일(화) 00:00
죽설헌의 아름다움은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다. 하늘 높이 뻗어 있는 파초들이 원시림에 들어온 듯한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준다. <사진=박태후 화백 제공>
몇해전 ‘화가의 정원’에 가보고 싶은 적이 있었다. ‘타샤의 정원’의 주인장인 작가 타샤 튜터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관람한 후 더 간절해졌다. ‘비밀의 화원’ 등의 삽화를 그린 타샤 튜터는 미국 버몬트 주 시골에서 35년 넘게 홀로 방대한 정원을 가꾼 주인공으로 18세기 영국식으로 꾸민 그녀의 정원은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는 글로벌 명소로 자리잡았다.

‘타샤의 정원’ 효과 때문인지 근래 창작의 산실이자 땀의 결정체인 ‘화가의 정원’이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100대 정원’에 뽑힌 충북 청주의 ‘운보의 집’을 비롯해 나주 금천면에 자리한 한국화가 박태후 화백의 ‘죽설헌’, 프랑스 지베르니의 ‘모네의 정원’이 대표적이다.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달 중순, 나주 금천면의 죽설헌(竹雪軒)을 찾았다. 우산을 쓰고 숲속을 거니는 느낌은 특별했다. 먹구름 낀 하늘과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 부채처럼 펄럭이는 파초가 어우러진 풍경은 웅장하면서도 신비로웠다. 특히 조븟한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수종(樹種)의 향연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한국화가 시원 박태후 화백(조경가)이 머무는 죽설헌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50년 간 혼자 일궈낸 개인 정원이라는 점이다. 평소 나무와 꽃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원예학교 졸업 후 농촌지도소에서 일하며 틈틈히 아껴 모은 돈으로 1만3천 여 평에 이르는 정원을 꾸몄다. 특히 한국 고유의 정원을 꿈꾼 박 화백은 모든 나무와 꽃을 직접 가꾸며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차별화된 정원’을 탄생시켰다

무엇보다 사시사철 나무와 꽃이 빚어내는 색채의 향연이 인상적이다. 따뜻한 봄에는 흐드러지게 핀 노랑꽃 창포가 싱그러운 활력을 뽐내고, 신록이 우거진 여름에는 하늘 높이 솟은 파초의 군락이 이국적인 세계로 이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는 강렬한 색상의 꽃무릇(상사화)이 황홀한 감흥을 선사하고, 눈내리는 겨울에는 이름 그대로 눈덮힌 대나무의 집(죽설헌) 설경이 장관을 이룬다.

그가 직접 수집해 쌓은 기와 담장 밑에는 옥잠화의 향기가 방문객을 유혹하고 평소 박 화백 부부 이외에는 사람이 지나 다니지 않아서인지 질경이들로 수북해진 길이 카펫처럼 푹신하다. 말 그대로 시간과 자연, 화가의 열정으로 탄생한 대지미술이다.

죽설헌 한켠에 놓여 있는 나무의자는 박태후 화백이 아끼는 쉼터이자 사색공간이다.
실제로 박 화백은 자르고 깍고 다듬는 일본 정원과 달리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내기 위해 절제된 관리를 하고 있다. 원래 이 곳에 터를 잡고 있었던 소나무 이외에는 모든 나무와 식물을 직접 심었지만 상당수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가 발아해 자생적으로 숲을 이뤘다. 이 때문에 죽설헌을 산책하다 보면 인위적인 손길에서 느끼기 힘든 원시림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적자생존의 법칙’이다.

이는 조경가로서의 박 화백의 내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첫 직장인 농촌지도소에서 조경업무를 맡은 그는 자연의 생명력과 한국적 토양에 대해 전문성과 현장감각을 익혔다. 이 때 그가 터득한 건 자연의 신비였다. 즉, 자연의 숲은 원래의 아름다움이 있는 만큼 원형 그 자체를 살리는 게 최고의 관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죽설헌에 공을 들인 건 나무의 간격을 고려해 오솔길을 내고 그 옆에 기왓장과 돌을 쌓는 정도였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화가의 정원’은 로망의 대상이다. 독특한 미적 안목을 지닌 작가들의 정원은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될 수 있어 한번쯤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참새와 홍시가 바로 그렇다. 아침이면 그의 단잠을 깨우는 ‘불청객’ 참새와 처마 밑에 걸려 조금씩 단맛이 들어가는 감은 자연스럽게 화선지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특히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추구하는 그의 철학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가급적이면 최대한 작게 그리는 대신 여백을 과감하게 비어 두는 자유분방한 붓질에 녹아 있다. 박 화백은 “죽설헌의 모든 게 그림의 소재이며, 철학이다. 번잡한 현대 사회와 거리를 두고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유하고 느긋하게 그림을 그리면서 마침내 꿈꾸던 여유를 찾았다”고 말했다.

박 화백의 화실
50년 가까이 죽설헌의 주인장으로 살면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접고 화가이자 조경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지만 가슴 한켠에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 가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는 죽설헌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 확신을 준 계기가 있었다. 10여 년 전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둘러본 박 화백은 정원의 잠재력을 실감했다. 일본식 정원에 영감을 받아 가꾼 모네의 정원에는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작은 마을인 지베르니에는 갤러리, 카페, 패션숍 등 다양한 문화공간들이 성업중이었던 것이다. ‘모네의 정원’ 효과를 눈으로 목격한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이 생겼고 죽설헌을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화가의 정원’으로 정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죽설헌에서 방문객의 시선을 빼앗는 또다른 볼거리는 셀수 없이 많은 기와다. 수십 여년 전부터 전국을 돌아 다니며 기와를 모은 그는 죽설헌의 대나무 밭과 꽃길 사이에 담장을 쌓아 색다른 운치를 만들어냈다. 기와 담장은 바람과 햇빛을 가로 막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경계이기도 하다.

수십년간 한국식 정원을 가꿔온 그는 지난 2017년 ‘죽설헌 원림’를 펴내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화가 박태후의 정원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직접 정원을 돌보면서 느낀 감정과 삶의 모습을 죽설헌의 아름다운 사계 풍경과 함께 담아내 호평을 받기도 했다.

박 화백은 “작가가 머무는 공간(집)은 어쩔 수 없이 작가를 닮을 수밖에 없다. 아무 때나 새가 날아들어 노닐고, 꽃이 피는 죽설헌이 내 작품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면서 “기회가 되면 죽설헌이 나주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이자 전남 관광의 한축을 맡는 랜드마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나주=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