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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육구연, ‘마음이 곧 이치’ 심즉리 강조한 유학자
2020년 09월 08일(화) 05:00
<초당대총장>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자는 자정(子靜)이고 호는 상산(象山)으로 강서성 금계 출신이다. 주희와 더불어 송대 성리학계를 양분한 유학자로 명대 왕양명, 양자호가 학풍을 계승했다.

남송 효종 건도 8년(1172) 진사 시험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지방관으로 근무했는데 융흥부 정안현 주부, 건녕부 숭안현 주부 등을 지냈고 국자정과 칙령소산정관을 역임했다. 어릴때부터 총명해 근본을 캐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 생각에 빠지면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3~4세때 부친에게 “왜 세상에 가난함이 생기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형제인 육구소, 육구령과 함께 삼육자(三陸子)로 불리었다.

하루는 고서를 읽다가 우주(宇宙)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사방을 우라 하고 지나간 과거, 미래, 현재를 주로 한다는 해석을 접하자 크게 깨달았다. 즉 우주 안의 모든 일은 내가 할 본분의 일이요, 내 본분의 일은 곧 우주의 모든 일이라는 인식이다. “우주는 곧 나의 마음이요, 내 마음은 곧 우주이다”라고 생각했다. 정명도, 정이천 선생의 학설을 이어 받았다. 주희가 “본성이 곧 이치다”라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 반면 육구연은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심즉리(心卽理)를 강조했다. 주희가 도학의 이학 일파를 세웠다면 육구연은 심학 일파를 세운 거유(巨儒)로 평가된다. 육구연은 주희가 주창하는 성리학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공리공론에 빠져들었음을 못마땅히 생각했다. 심학은 주자학에 압도되었지만 명나라때 왕양명, 양자호가 이를 계승해 강서성, 저장성 중심으로 크게 성행했다. 왕양명은 이를 육왕학파(陸王學派)로 발전시켰다.

주희와 육구연은 1175년 강서성 연산현의 아호사에서 만나 도학에 관해 깊이 논쟁했으나 합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역사상 유명한 ‘아호의 만남’이다. 둘의 관계는 초기에는 비교적 냉랭했지만 효종 순희 5년(1178)을 기점으로 점차 변화해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육구연의 제자가 주희를 방문하기도 하고 육구연 스스로 1179년 주희를 찾아가 3일간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인 육구령이 죽은 후에는 점차 소원해져 양 진영은 사실상 결별하는 관계가 되었다. 주희와 육구연 양인도 더 이상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육구연은 순희 8년(1181) 2월 백록동서원에서 “군자는 의리를 좋아하고 소인은 이익을 좋아한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는 주제로 강론을 하였다. 배우는 사람들은 의리와 이익에 대해 자신의 뜻을 확고히 구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주희는 이에 대해 평하기를 “강의 내용은 간절하면서도 명료하였다.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감명을 받아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깊이 경계해 간다면 틀림없이 덕을 이루는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 자주 오르는 산의 모양이 코끼리와 비슷해 상산(象山)이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상산옹이라 하였다. 각지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운집하여 도를 배웠다. 형 욱구령과 함께 강서의 이육(二陸)으로 불렸다. “이 마음이 선량함은 하늘이 내가 부여한 것이다. 능히 선량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주 안에 지극한 이치가 아닐 것이 없고 성현과 나는 동류(同類)이다”라고 주장했다. 육구연의 유심론(唯心論)은 아래의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영험하며 이 이(理)는 지극히 밝다. 사람은 모두 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마음이 모두 이 이(理)를 갖추고 있다.” 이에 대해 주희는 비판하기를 “육씨 형제의 기상은 매우 좋다. 하지만 강학을 버리고 실천에만 전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점차 이학(異學)으로 흐를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육구연은 젊은 시절 금나라에게 약화된 국세를 회복할 방책을 건의했지만 조정은 이를 수용치 않았다. 이에 낙향해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광종 초에는 형문군의 직책을 맡아 변방의 방어를 공고히 하는 등 치적을 쌓았다. 1193년 12월 병사했다. 사후 문안(文安)의 시호가 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