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게…품격있는 일터·쉼터로 재창조
(6)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
2020년 04월 06일(월) 00:00
“군청은 사람이 아닌 자동차가 모든 공간을 점령해 버렸다.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무주군청의 뒷마당을 혁신하면서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정기용의 ‘감응의 건축’ 중에서)

전북 무주군청으로 취재에 나서던 날, ‘말하는 건축가’로 잘 알려진 고 정기용(1945~ 2011년) 선생의 생전 일화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과연 선생의 ‘혁신’은 통했을까? 무주 군청이 가까워지자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괜시리 발걸음이 바빠졌다.

그런데 웬걸, 군청 건물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3층 규모의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이었다. 정기용 건축가의 손을 거친 특별한 건축물이라는 세간의 평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굳이 차이점을 꼽으라면 담이 없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고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무주곤충박물관은 상설전시관, 희귀곤충관, 3D 입체영상실, 돔영상실, 생태 온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생태온실 내부. ⓒ 무주 곤충박물관
하지만 얼마 후 이런 선입견은 보기 좋게 깨졌다. 주차를 위해 군청을 끼고 뒤편으로 돌아가자 180도 다른 풍경이 등장했다. 전국의 어느 관공서를 가든 자동차가 빽빽하게 주차돼 있는 것과 달리 각양각색의 꽃과 벤치로 조성된 생태 공원이 펼쳐진 것이다. 주차는 지하로 들어가거나 본청 옆의 차 쉼터라는 4층 건물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자동차들이 점령한 여타 청사들의 삭막한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주차장 대신 주민들의 쉼터로 개방한 무주군청 뒷마당
한낮의 군청 뒷마당은 도심 속 쉼터를 방불케 했다. 콘크리트 바닥 대신 잔디와 나무로 꾸며진 산책로에서 부터 동그라미 모양의 대형 화단,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꽃들이 어우러져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군청의 붉은 벽돌 외벽은 담쟁이 넝쿨이 감싸고 있고 벤치에는 마스크를 쓴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르신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무주군청이 군민들의 광장으로 변신하게 된 건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 덕분이다. 지난 1996년 당시 김세웅 무주군수와 정기용 건축가가 손잡고 2006년까지 약 10년간 무주군청을 필두로 면사무소, 박물관, 운동장, 버스 정류장 등 30 여 개의 건물을 새롭게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한 명의 건축가가 단일 지역을 대상으로 진행한 공공건축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돼 건축계의 핫이슈가 되기도 했다.

정 건축가 무주와 인연을 맺게 된 건 1994년. 당시 무주군 청년들이 골프장 건립을 반대하자 예술인 마을을 제안하기 위해 강내희 중앙대 교수와 정 건축가가 무주를 찾게 됐다. 이 지역에 살던 허병선 목사는 두 사람에게 안성면 진도리에 마을회관을 지어달라고 요청했고 정 건축가는 처음 지어보는 마을회관의 아이디어를 얻으려 주민들을 만났다.

“마을회관 보다 공중 목욕탕을 지어달라.” 주민들은 마을회관의 컨셉을 잡기 위해 온 정 건축가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목욕탕이 너무 멀어 버스를 타고 읍내로 가는게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의 ‘희망사항’을 접수한 그는 마을회관 2층에 공중목욕탕을 설계했고 준공식날 축사를 위해 참석한 김 군수와 만나면서 공공건축 프로젝트의 씨앗을 뿌렸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지난 2012년 상영된 영화 ‘말하는 건축가’에도 나온다. 자신이 설계한 공중 목욕탕이 쓸 만한지 느껴 보기 위해 직접 옷을 벗고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는 ‘씬’이다. 관객들은 이 뒷모습을 보면서 사람에 대한 배려를 중시한 그의 남다른 면모에 감동을 받았다.

이처럼 건축주가 아닌 이용자들이 원하는 것을 설계에 반영하는 그의 건축 철학은 김 군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정 건축가에게 무주 군청 리노베이션 등 군의 여러 공공건축물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정 건축가는 김 군수의 요청을 받아 들여 노후화된 군청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주차 공간을 지하로 빼고 대신 군민들이 소통하는 공간으로 단장했다. 민원실과 본관, 군의회 사이에는 회랑을 내 비나 눈이 올 때 우산을 쓰지 않아도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햇별을 가리는 등나무를 관중석에 설치한 공설 운동장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의 또 다른 명물은 공설운동장이다. 당시 김 군수는 행사 때마다 텅 빈 객석이 많아 군민들에게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군수만 본부석에서 햇볕 피하고 우리는 땡볕에 서 있으라고 하니 가기 싫다”는 답이 돌아왔단다. 이에 정 건축가는 관중석에 등나무를 심고 이 나무들이 잘 자라도록 줄기 크기에 맞추되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지지대를 만들었다.

이후 주민들은 햇볕이 들지 않는 관중석에 앉아 군 행사나 축제, 영화도 관람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실제로 등나무 운동장은 무주의 대표 축제인 반딧불 축제, 무주산골영화제 등 각종 문화행사의 무대로 활용되고 있다. 부남면의 면사무소를 설계할 때에는 유난히 밤 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마을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천문대를 설계했다. 이 때문에 무주 군민들은 밤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싶을 땐 부남면 면사무소 천문대로 나들이를 떠난다.

무주곤충박물관 전경
무주의 자랑인 반디랜드(설천면 청량리)에도 정 건축가의 ‘분신’이 있다. 바로 무주 곤충박물관이다. 박물관 지붕에서 야외공간으로 외부경사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선이 특징적인 건축물이다. 낮은 담, 풍경이 보이는 창, 담쟁이 넝쿨 등 정 건축가의 ‘컬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으로 상설전시관, 희귀곤충관, 3D 입체영상실, 돔영상실, 생태 온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과 건물이 이어지는 중정을 거닐다 보면 실내가 바깥이 되고, 바깥이 실내가 되는 등 자연과 하나되는 특별한 체험을 누릴 수 있다. 연중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박물관에는 풍뎅이, 하늘소, 사슴벌레, 딱정벌레 등 1만3000여점의 곤충 표본이 전시돼 있다.

공공건축 프로젝트는 인구 2만 4000명의 시골 마을을 전국에 알리는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비록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지만 주민들의 삶을 건축에 스며들게 한 정 건축가의 독특한 철학은 공공건축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한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가 지닌 의미는 건축가와 주민, 공무원이 의기투합해 만든 합작품이라는 점이다. 특히 김 전 무주 군수의 의지와 마인드가 없었다면 현재의 결실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건축계의 중론이다. 지난 2007년 1월 ‘건설기술·건축문화 선진화위원회’(위원장 김진애)는 지역 특성을 잘 표현한 건축물의 사례로 ‘무주군 공공건축물’ 31개를 ‘이달의 건축환경문화’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무주=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