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다 지나가고 있다. 올해가 작년이 되고 내년이 올해가 되는 날은, 이제 채 반삭(半朔:한 달의 절반)도 남지 않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세월이 빠르다는 ‘쏜살같다’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계절이다. 문득 ‘앞으로 살아 갈 날이 이제껏 살아 온 날보다 훨씬 더 적어진 게 언제부터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 백세’를 산다 해도.
‘백세 인생’이란 노래가 떠오른다. 대화창에 오고 가는 ‘짤방’(짤림 방지를 위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25년 무명가수였던 이애란(52)을 스타로 만든 노래다. 이 노래는 가락도 구수하지만 재미있는 가사가 나이 든 세대의 무릎을 탁 치게 한다.
“육십 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그리고 칠십 세엔 ‘할 일이 아직 남아서’, 팔십 세엔 ‘아직은 쓸 만해서’…. 이런 식으로 백세까지 이어진다.
노래가 뜨면서 ‘∼한다고 전해라’의 온갖 패러디도 온라인상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부장이 회식 자리에서 날 찾으러 오거든 피곤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교수님이 과제 빨리 내라 하거든 재촉 말라고 전해라”, “직장 상사가 왜 출근 안 하냐고 묻거든 오늘 아파서 못 나간다고 전해라” 하는 식이다.
패러디(parody)는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이다. 언제 봐도,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게 패러디다. 올 연초에 카톡으로 받았던 ‘해설이 딸린 패러디’ 역시 지금 또 읽어 봐도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면세 담뱃값이 싸게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해(害) 될세라 그를 두려워하노라”
【해설】노계 박인로의 ‘반중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를 패러디한 시조. 때는 2015년 초, 담뱃값이 막 두 배 가까이나 올랐던 시기. 작가는 제주도 여행을 마친 뒤 돌아오는 길에 공항 면세점에서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한다. 시중에 비해 절반 가격도 안 되는 싼 담배를 사고자 늘어선 애연가들. 비행기표 한 장당 한 보루씩만 구매할 수 있다는 규정에, 어린 아들·딸들의 탑승권까지 가져와 한 보루라도 더 사 보려 애쓰는 이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혀를 끌끌 차며 이를 지켜보던 작가는 문득 애연가인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한심하게만 생각했던 그 길고 긴 줄에 합류하게 된 작가는 곧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과연 이것이 효도인가? 날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아버지께 만병의 근원인 담배를 가져다 드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육적(陸績)이 품은 것은 건강에 좋은 유자였고 박인로(朴仁老) 역시 맛있는 홍시였는데 내가 품은 것은 백해무익한 담배라. 비록 지금은 날 반겨 주실 아버지가 계시지만 내가 품어 간 이걸로 인해 아버지의 부재를 겪게 된다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어리석은 자신의 소행에 대해 자괴감을 금하지 못하던 작가의 심경이 잘 드러난 시조다.
면세점에서 사 온 한 보루의 담배를 받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딱 이것만 피우고 끊겠노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신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덧 또다시 1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이제 얼마 있으면 새해를 맞는다.
아비는 병신년 새해가 되기 전에 아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망을 회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40여 년을 함께했던 이 다정한 연인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헤어져야겠다고 독하게 맘을 먹었다. 그리고 어렵게 결별을 통보한 게 지난달 첫눈이 내리던 어느 날(11월26일)이었다. 그렇게 헤어진 뒤 그럭저럭 한 달 가까이 견뎌 온 셈인데, 많이 힘들고, 아직도 많이 그립다. 특히 지금 이 글을 쓰면서는 더욱 괴롭기 짝이 없다.
웬만한 여자의 유혹에는 잘 넘어가지 않는 편이지만 하루 20번 이상 다가오는 이 달콤한 유혹만은 참으로 뿌리치기 힘들다. 혈연·지연·학연과 함께 ‘인생의 4대 인연’이라 할 흡연을 그야말로 한순간에 끊었으니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요즘엔 ‘담배 끊은 놈이 독한 놈이 아니라, 담배를 아직도 피우고 있는 놈이 독한 놈’이라는 소리가 있긴 하지만 어렵고도 어려운 것이 금연이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는 금연의 어려움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담배를 끊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백 번도 넘게 끊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작심삼일(作心三日)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금연에 한 번 실패했다 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할 일은 아니다. 백 번도 넘게 끊고 또 끊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끊을 수 있는 날도 오지 않겠는가.
이제 새해가 되면 많은 애연가들이 또 금연을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쉽게 끊을 수 있을까? 여기 성공 사례가 하나 있으니 주인공은 이시종 충북 도지사다. 그는 40년간 하루 두 갑씩을 피워 대던 골초였다. 금연학교를 다녀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딱 끊었는데 비결은 간단했다.
끊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흡연을 잠시 중단하기로 맘먹은 것이다. 10년만 참기로 했다고 한다. 신기했다. 언젠가는 피울 수 있다는 희망이 금연을 가능하게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내년이면 이 지사는 스스로 정한 이 금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오, 부럽다. 난 10년을 채우려면 9년11개월이나 남았는데….
머리가 미련한 탓에 한 권의 책을 수만 번씩 읽은 끝에 59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한 조선시대 선비 김득신은 자신의 묘갈명(墓碣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학문에 힘쓰는 자는/ 재주가 다른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선(한계)을 긋지 말라.(勉學者 無以才不猶人自晝也)/ 이 세상에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 이루었다.(莫魯於我 終亦有成)”
이제 글을 마무리할 차례다. 패러디로 글을 시작했으니 패러디로 끝내야겠다. “금연에 힘쓰는 자는/ 의지가 다른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선을 긋지 말라”
〈주필〉
‘백세 인생’이란 노래가 떠오른다. 대화창에 오고 가는 ‘짤방’(짤림 방지를 위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25년 무명가수였던 이애란(52)을 스타로 만든 노래다. 이 노래는 가락도 구수하지만 재미있는 가사가 나이 든 세대의 무릎을 탁 치게 한다.
노래가 뜨면서 ‘∼한다고 전해라’의 온갖 패러디도 온라인상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부장이 회식 자리에서 날 찾으러 오거든 피곤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교수님이 과제 빨리 내라 하거든 재촉 말라고 전해라”, “직장 상사가 왜 출근 안 하냐고 묻거든 오늘 아파서 못 나간다고 전해라” 하는 식이다.
패러디(parody)는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수법이다. 언제 봐도,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게 패러디다. 올 연초에 카톡으로 받았던 ‘해설이 딸린 패러디’ 역시 지금 또 읽어 봐도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해설】노계 박인로의 ‘반중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를 패러디한 시조. 때는 2015년 초, 담뱃값이 막 두 배 가까이나 올랐던 시기. 작가는 제주도 여행을 마친 뒤 돌아오는 길에 공항 면세점에서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한다. 시중에 비해 절반 가격도 안 되는 싼 담배를 사고자 늘어선 애연가들. 비행기표 한 장당 한 보루씩만 구매할 수 있다는 규정에, 어린 아들·딸들의 탑승권까지 가져와 한 보루라도 더 사 보려 애쓰는 이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혀를 끌끌 차며 이를 지켜보던 작가는 문득 애연가인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한심하게만 생각했던 그 길고 긴 줄에 합류하게 된 작가는 곧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과연 이것이 효도인가? 날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아버지께 만병의 근원인 담배를 가져다 드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육적(陸績)이 품은 것은 건강에 좋은 유자였고 박인로(朴仁老) 역시 맛있는 홍시였는데 내가 품은 것은 백해무익한 담배라. 비록 지금은 날 반겨 주실 아버지가 계시지만 내가 품어 간 이걸로 인해 아버지의 부재를 겪게 된다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어리석은 자신의 소행에 대해 자괴감을 금하지 못하던 작가의 심경이 잘 드러난 시조다.
면세점에서 사 온 한 보루의 담배를 받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딱 이것만 피우고 끊겠노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신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덧 또다시 1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이제 얼마 있으면 새해를 맞는다.
아비는 병신년 새해가 되기 전에 아들로부터 잃어버린 신망을 회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40여 년을 함께했던 이 다정한 연인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헤어져야겠다고 독하게 맘을 먹었다. 그리고 어렵게 결별을 통보한 게 지난달 첫눈이 내리던 어느 날(11월26일)이었다. 그렇게 헤어진 뒤 그럭저럭 한 달 가까이 견뎌 온 셈인데, 많이 힘들고, 아직도 많이 그립다. 특히 지금 이 글을 쓰면서는 더욱 괴롭기 짝이 없다.
웬만한 여자의 유혹에는 잘 넘어가지 않는 편이지만 하루 20번 이상 다가오는 이 달콤한 유혹만은 참으로 뿌리치기 힘들다. 혈연·지연·학연과 함께 ‘인생의 4대 인연’이라 할 흡연을 그야말로 한순간에 끊었으니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요즘엔 ‘담배 끊은 놈이 독한 놈이 아니라, 담배를 아직도 피우고 있는 놈이 독한 놈’이라는 소리가 있긴 하지만 어렵고도 어려운 것이 금연이다. 그래서 찰스 디킨스는 금연의 어려움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담배를 끊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백 번도 넘게 끊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작심삼일(作心三日)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금연에 한 번 실패했다 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할 일은 아니다. 백 번도 넘게 끊고 또 끊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끊을 수 있는 날도 오지 않겠는가.
이제 새해가 되면 많은 애연가들이 또 금연을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쉽게 끊을 수 있을까? 여기 성공 사례가 하나 있으니 주인공은 이시종 충북 도지사다. 그는 40년간 하루 두 갑씩을 피워 대던 골초였다. 금연학교를 다녀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딱 끊었는데 비결은 간단했다.
끊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흡연을 잠시 중단하기로 맘먹은 것이다. 10년만 참기로 했다고 한다. 신기했다. 언젠가는 피울 수 있다는 희망이 금연을 가능하게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내년이면 이 지사는 스스로 정한 이 금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오, 부럽다. 난 10년을 채우려면 9년11개월이나 남았는데….
머리가 미련한 탓에 한 권의 책을 수만 번씩 읽은 끝에 59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한 조선시대 선비 김득신은 자신의 묘갈명(墓碣銘)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학문에 힘쓰는 자는/ 재주가 다른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선(한계)을 긋지 말라.(勉學者 無以才不猶人自晝也)/ 이 세상에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나는 결국 이루었다.(莫魯於我 終亦有成)”
이제 글을 마무리할 차례다. 패러디로 글을 시작했으니 패러디로 끝내야겠다. “금연에 힘쓰는 자는/ 의지가 다른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선을 긋지 말라”
〈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