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석의 ‘타박네야’를 한때 즐겨 불렀다. 즐겨 부르긴 했지만 노랫말 중에 한 군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의문을 늘 가슴에 품어 왔다. “명태 주랴∼ 명태 싫다/ 가지 주랴∼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아이는 젖을 달라는데 왜 느닷없는 명태가 나오고 가지가 나오는 것일까. 혹시 민요를 채집해 대중가요로 발표하는 과정에서 노랫말이 잘못된 건 아닐까.
아마 그런 짐작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최근 어떤 소설을 읽으면서였다. 소설 속에서는 이 노래가 자장가로 나온다. “은패(銀牌) 줄게∼ 가지마라/ 은패 싫다∼ 갖기 싫다/ 내 어미∼ 젖만 다오”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은패’가 ‘명태’로, ‘갖기 싫다’가 ‘가지 싫다’로 바뀐 게로구나.
소설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평소 내 지론이다. 요즘 읽고 있는 이 소설은 ‘왜 이제야 추켜들게 됐나’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재미있다. ‘마누라에게는 오미자처럼 다섯 가지 맛이 있다’는 것도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됐다.
"여편네란 오미구존(五味具存: 다섯 가지 맛을 다 갖춤) 한 것일세. 갓 혼인한 여편네는 그 달기가 마치 꿀이지. 그렇지만 살림 재미가 붙기 시작하면 여편네란 장아찌 무같이 짭짤하다네. 그 짭짤하던 맛깔이 좀 더 쇠면 이번엔 시금털털 개살구로 변하느니. 맛이 시어질 고비에서부터 가끔 톡톡 쏘는 매운맛이 나기 시작하는데, 고초당초 맵다지만 여편네 매운맛이란 땅벌인들 당적할까. 매운맛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뒈질 때까지 쓰기만 하다네." 아마도 많은 남정네들이 진한 공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다.
요즘엔 이 소설이 드라마(‘장사의 신 객주’)로 만들어져 방영되고 있다. 김주영의 ‘객주’. 소설을 읽으면서 얻은 망외의 소득도 많다. ‘서울깍쟁이’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중 하나다. 어느 한 지방 사람들을 한데 묶어 부르는 별칭으로는 서울깍쟁이를 비롯해 전라도 ‘개땅쇠’, 강원도 ‘감자바우’, 충청도 ‘양반’, 경상도 ‘문둥이’, 그리고 이북에서 월남한 ‘삼팔따라지’ 등이 있다.
‘개’가 붙어 좋은 말이 별로 없지만 개땅쇠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말일까. 조선시대에는 상놈의 자식들을 마당쇠·돌쇠 등으로 불렀으니 ‘쇠’는 남을 낮잡아 이르는 말임을 금방 알겠다. 그럼 개땅쇠에서의 ‘개’는 개(犬)를 의미하는 걸까. 아니다. 사전에서 ‘개땅’을 찾아보면 ‘바닷물이 드나드는 땅’으로 풀이돼 있다. 개땅은 갯벌인 것이다.
“1925년 전북 김제군 광활면 일대 갯벌의 대규모 간척 공사에 전국의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해안 지형은 ‘개땅’으로 바뀌었다. 간척민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개척한 그 개땅에 소작인으로 눌러앉아 살면서 일본인들의 착취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그들은 인고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자신들을 가리켜 ‘개땅쇠’라 불렀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울깍쟁이란 말은 한 단어로 사전에 올라 있다. ‘시골 사람이 서울 사람의 까다롭고 인색함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물건을 잘 깎으니 깍쟁이인가 그리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했다. 그래 이 말의 유래를 모른 채 줄곧 지내왔는데 ‘객주’를 읽다가 ‘깍정이’란 단어를 만난 것이다. 수표교를 비롯해 서울의 여러 다리 밑 움집에는 깍정이들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구걸 행각을 하거나 남의 장사(葬事)를 지내 주며 살던 천한 무리였다. 아, 다시 한 번 무릎을 쳤다. 서울깍쟁이는 바로 이 깍정이가 변한 말이로구나.
소설 ‘객주’는 우리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읽다 보면 여기저기서 모르는 말이 튀어나와 애를 먹게 된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살아가는 처지이건만 이렇게도 우리말 어휘 실력이 부족했던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옹춘마니’ 같은 단어는 가슴에 깊이 박혔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말하기에. 소견이 좁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사람.
곰비임비(일이 계속 일어남을 나타내는 말), 옴니암니(자질구레한 일까지 좀스럽게 셈하거나 따지는 모양. 어금니와 앞니), 생게망게(하는 행동이나 말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는 모양), 언죽번죽(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고 비위가 좋아 뻔뻔한 모양), 애면글면(몹시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갖은 애를 쓰는 모양)…. 소설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우리말들이다.
여리꾼(상점 앞에 서서 손님을 끌어들여 물건을 사게 하고 주인에게 삯을 받는 사람. ‘삐끼’), 발쇠꾼(남의 비밀을 캐내어 다른 사람에게 넌지시 알려 주는 짓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 샐닢(매우 적은 액수의 돈), 길미(이익), 대궁밥(누군가 먹다가 남긴 밥), 너비아니(얄팍하게 저며 양념에 구운 쇠고기)….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말들이다.
교과서에 나와 우리에게 친숙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모국어를 소재로 한 아름다운 단편소설이다. “내일부터는 독일어만 배워야 합니다.” 이날따라 정장을 한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온 어린 학생들에게 말한다. “프랑스 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분명하며 굳센 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이 노예가 된다 하더라도 국어만 간직하고 있으면 자기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569돌 한글날이다. 한글날만 되면 인터넷 언어의 규범 파괴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걱정하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좋은 말은 살아남고 나쁜 말은 사라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가령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땐 빠져라)나 ‘장미단추’(장거리 미녀 단거리 추녀) 같은 말도 잠시 유행하고 말지 어떨지는 세월이 한참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세자(훗날 문종)에게 일찌감치 양위를 하면서까지 공들여 만든 세계적 발명품이다. 후손들은 그것을 잘 보존해야 할 책무가 있다. 한글날은 우리글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우리말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날이다.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운 우리 말과 글을 가꾸고 꽃피게 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이 글을 읽는 아이들은 ‘꼰대’ 같은 소리 그만 하라며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을 외칠지도 모르겠다.
〈주필〉
아마 그런 짐작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최근 어떤 소설을 읽으면서였다. 소설 속에서는 이 노래가 자장가로 나온다. “은패(銀牌) 줄게∼ 가지마라/ 은패 싫다∼ 갖기 싫다/ 내 어미∼ 젖만 다오”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은패’가 ‘명태’로, ‘갖기 싫다’가 ‘가지 싫다’로 바뀐 게로구나.
"여편네란 오미구존(五味具存: 다섯 가지 맛을 다 갖춤) 한 것일세. 갓 혼인한 여편네는 그 달기가 마치 꿀이지. 그렇지만 살림 재미가 붙기 시작하면 여편네란 장아찌 무같이 짭짤하다네. 그 짭짤하던 맛깔이 좀 더 쇠면 이번엔 시금털털 개살구로 변하느니. 맛이 시어질 고비에서부터 가끔 톡톡 쏘는 매운맛이 나기 시작하는데, 고초당초 맵다지만 여편네 매운맛이란 땅벌인들 당적할까. 매운맛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뒈질 때까지 쓰기만 하다네." 아마도 많은 남정네들이 진한 공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다.
‘개’가 붙어 좋은 말이 별로 없지만 개땅쇠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말일까. 조선시대에는 상놈의 자식들을 마당쇠·돌쇠 등으로 불렀으니 ‘쇠’는 남을 낮잡아 이르는 말임을 금방 알겠다. 그럼 개땅쇠에서의 ‘개’는 개(犬)를 의미하는 걸까. 아니다. 사전에서 ‘개땅’을 찾아보면 ‘바닷물이 드나드는 땅’으로 풀이돼 있다. 개땅은 갯벌인 것이다.
“1925년 전북 김제군 광활면 일대 갯벌의 대규모 간척 공사에 전국의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해안 지형은 ‘개땅’으로 바뀌었다. 간척민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개척한 그 개땅에 소작인으로 눌러앉아 살면서 일본인들의 착취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그들은 인고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자신들을 가리켜 ‘개땅쇠’라 불렀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울깍쟁이란 말은 한 단어로 사전에 올라 있다. ‘시골 사람이 서울 사람의 까다롭고 인색함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물건을 잘 깎으니 깍쟁이인가 그리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했다. 그래 이 말의 유래를 모른 채 줄곧 지내왔는데 ‘객주’를 읽다가 ‘깍정이’란 단어를 만난 것이다. 수표교를 비롯해 서울의 여러 다리 밑 움집에는 깍정이들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구걸 행각을 하거나 남의 장사(葬事)를 지내 주며 살던 천한 무리였다. 아, 다시 한 번 무릎을 쳤다. 서울깍쟁이는 바로 이 깍정이가 변한 말이로구나.
소설 ‘객주’는 우리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읽다 보면 여기저기서 모르는 말이 튀어나와 애를 먹게 된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살아가는 처지이건만 이렇게도 우리말 어휘 실력이 부족했던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옹춘마니’ 같은 단어는 가슴에 깊이 박혔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말하기에. 소견이 좁고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 사람.
곰비임비(일이 계속 일어남을 나타내는 말), 옴니암니(자질구레한 일까지 좀스럽게 셈하거나 따지는 모양. 어금니와 앞니), 생게망게(하는 행동이나 말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는 모양), 언죽번죽(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고 비위가 좋아 뻔뻔한 모양), 애면글면(몹시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갖은 애를 쓰는 모양)…. 소설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우리말들이다.
여리꾼(상점 앞에 서서 손님을 끌어들여 물건을 사게 하고 주인에게 삯을 받는 사람. ‘삐끼’), 발쇠꾼(남의 비밀을 캐내어 다른 사람에게 넌지시 알려 주는 짓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 샐닢(매우 적은 액수의 돈), 길미(이익), 대궁밥(누군가 먹다가 남긴 밥), 너비아니(얄팍하게 저며 양념에 구운 쇠고기)….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말들이다.
교과서에 나와 우리에게 친숙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모국어를 소재로 한 아름다운 단편소설이다. “내일부터는 독일어만 배워야 합니다.” 이날따라 정장을 한 선생님은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온 어린 학생들에게 말한다. “프랑스 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분명하며 굳센 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이 노예가 된다 하더라도 국어만 간직하고 있으면 자기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569돌 한글날이다. 한글날만 되면 인터넷 언어의 규범 파괴가 심각한 수준이라며 걱정하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좋은 말은 살아남고 나쁜 말은 사라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가령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땐 빠져라)나 ‘장미단추’(장거리 미녀 단거리 추녀) 같은 말도 잠시 유행하고 말지 어떨지는 세월이 한참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세자(훗날 문종)에게 일찌감치 양위를 하면서까지 공들여 만든 세계적 발명품이다. 후손들은 그것을 잘 보존해야 할 책무가 있다. 한글날은 우리글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우리말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날이다.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운 우리 말과 글을 가꾸고 꽃피게 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이 글을 읽는 아이들은 ‘꼰대’ 같은 소리 그만 하라며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을 외칠지도 모르겠다.
〈주필〉
